정통부장관 시절인 2004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와 만난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회장. 사모펀드 초창기엔 투자자를 모으려면 이 정도 급의 '빅 네임'이 필요했다. [중앙포토]
도입 15년만에 급성장한 사모펀드
초기 10억 투자도 어려웠지만
이젠 설립 전부터 글로벌 투자
돈 아닌 탄탄한 산업이 기본
최고 스펙 '인재 블랙홀'은 여전
2006년 스카이레이크 창립식 모습. 인텔연구소 출신 이강석 부사장과 54세에 사업을 시작한 진대제 회장, IB업계에서 온 최승우 부사장, 박상일 부사장(앞줄 왼쪽부터). 뒷줄은 홍주일 부장, 김영민 상무, 김창근 고문, 김앤장 출신 이응진 부사장, 원재준 상무. [사진 스카이레이크]
그리고 2019년. 카이스트 도곡 캠퍼스 바로 옆 조그마한 대동빌딩 2층 사무실 한 칸에서 시작한 스카이레이크가 도곡 캠퍼스가 저 멀리 보이는 5층짜리 사옥으로 옮기고 직원 7명에서 6000여 명(인수기업 직원 포함)으로 는 것만큼이나 극적으로, 사모펀드는 도입 15년 만에 눈부신 성장을 했다.
급작스럽게 오너 세대교체가 이뤄진 한진 지주사 한진칼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KCGI(일명 강성부 펀드)나 롯데카드 인수전에서 하나금융을 제치고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한앤컴퍼니 등만 봐도 사모펀드의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본시장 큰손인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KIC)도 사모펀드 투자 확대를 결정했다.
이러니 한국 경제의 미래가 어둡다는 걱정 속에서도 사모펀드 업계만은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2014년 말 162개사였던 경영참여형(GP) 사모펀드가 불과 3~4년 만에 232개사(2018년 6월)로 크게 늘어난 배경이다. 또 아시아 1위로 성장한 MBK파트너스 등 기존의 대형사가 존재감을 과시하며 인재를 끌어들이는 한편 젊은 전문가들이 속속 겁 없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업계에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요즘 젊은 컨설턴트는 대기업이 아닌 사모펀드행을 가장 원한다"고 말했다.
MIT 경영대학원(MBA)을 마치고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전략 컨설턴트를 거쳐 CJ ENM 글로벌 사업팀장을 지낸 박정무(42) 대표가 설립 준비 중인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등 라이프스타일을 전문으로 하는 ATU파트너스(이하 ATU)도 그중 하나다. 박 대표는 CJ ENM과 YG 등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MBA·회계사·컨설턴트 출신 인재들을 어렵지 않게 끌어모았다. 진대제 같은 '빅 네임'은커녕 CJ ENM이나 맥킨지 같은 간판도 없이 테헤란로의 위워크(공유 오피스) 강남 1호점 14층에서 단출하게 시작하지만 이런 조건은 인재 영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ATU파트너스는 진대제 같은 '빅 네임' 없이 테헤란로의 위워크(공유 오피스) 강남 1호점 14층에서 단출하게 시작하지만 인재 영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요즘 사모펀드 업계는 간판보다 전문성을 더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임현동 기자
사모펀드 1세대 진제대 회장과 이제 막 뛰어든 박정무 대표. [중앙포토] 임현동 기자
2013년 삼성전자 후배인 김재욱 반도체총괄 전 사장(현 BNW인베스트먼트 회장)이 사모펀드 설립 조언을 구하러 찾아왔을 때 대뜸 "당신 돈 있느냐"고 물었던 이유다. 이미 성공 사례가 나온 이후였는데도 그랬다. 2012년, 진대제 1호 펀드가 투자한 얼굴인식 기술 관련 IT벤처 올라웍스가 인텔에 팔리면서 원금은 물론 60% 이상의 수익을 내자 투자자들은 "까먹는 돈으로 생각했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지금 스카이레이크는 국민연금에서만 7500억 원을 받아 굴린다.
반면 ATU는 아직 GP인가도 받기 전인데 벌써 K팝이나 K뷰티, E스포츠 등 콘텐트에 관심을 갖는 유수의 글로벌 톱 사모펀드 몇 곳으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았다. 각각 100억~500억 원으로 규모가 적지만 니치 산업(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전문가를 확보한 덕분이다.
위워크에 터를 잡은 ATU파트너스 직원들이 공용 라운지에서 얘기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무 대표더. 임현동 기자
기업 상속 이슈 등 중형 매물이 많아진 데다 이처럼 전문화된 시장이 열리는 시기이다 보니 기존의 투자은행(IB)이나 컨설팅업계뿐 아니라 대형 사모펀드에서 나와 업계 전문가와 손을 잡고 직접 차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엔터산업처럼 점점 규모는 커지는 데 시스템이 덜 고도화 되어 있어 기업 가치를 상승시킬 여지가 있는 산업 분야에서 기회를 노린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산업에 대한 전문성은 필수"라고 했다. 2018년 7월에 나온 맥킨지의 사모펀드 보고서도 "2013년 이후 코스피지수가 1~3%의 저조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사모펀드는 지금까지 평균 20%가 넘는 내부수익률을 올리며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했다"며 "이젠 바이아웃을 넘어 시너지를 올리는 전략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 최고 인재들이 모인 사모펀드 업계는 그들의 주장대로 기업을 투명하게 만들어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기여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일각의 비판처럼 그들만의 돌려막기식으로 기업 가치를 부풀리기해서 자기들 주머니만 채우고 있는 걸까. 이 답은 사모펀드가 아니라 한국 산업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진 회장은 "싸고 비싼 매물은 늘 있는 것"이라며 "최근 2~3년 새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나빠진 게 걱정"이라고 했다. 기업을 사들일 땐 최소 5년 후를 내다봐야 하는데 누가 살까 싶을 정도로 역량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엔터산업은 거꾸로다. 박 대표는 "매수자가 늘어나고 영역도 글로벌로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
정반대의 얘기 같지만 사실은 같은 얘기다. "산업 경쟁력이 있어야 사모펀드도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지 돈 있다고 산업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는 진 회장 말처럼 탄탄한 산업 기반이 사모펀드 성장, 아니 한국 경제 경쟁력의 열쇠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