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이철호 칼럼] 문 대통령의 A4 용지와 링컨의 편지

bindol 2019. 8. 7. 04:51

나쁜 정치·외교에 망가진 경제
포퓰리즘으로 기초 체력도 허약
정치적 계산 포기해야 일본 이겨
내년 총선에 이용하는 건 금물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시장은 속일 수 없다. 일단 경제에 충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가격 변수부터 움직인다. 경제의 체온계인 주가와 환율이 대표적이다. 지난 주말부터 주가와 환율이 몸살을 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에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해져 버렸다. 냉정하게 보면 충격의 진원지는 미·중 경제전쟁이지만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제외 조치가 방아쇠를 당겨 금융시장에 발작이 일어났다. 연초 대비 한국의 주식과 원화가치가 주요국 중에서 가장 많이 빠졌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허약해진 것이다.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외부의 눈초리는 싸늘해진 지 오래다. 이미 “소득주도 성장은 명백히 나쁜 아이디어”(하버드대 로버트 배로 교수)·“멍청한 이론”(아서 래퍼 교수)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주엔 글로벌 투자운용사인 CLSA가 “문재인 정부의 반(反)자본주의적 정책 때문에 투자자들이 극단적 비관론에 사로잡혀 한국 증시가 붕괴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미국 블룸버그통신도 칼럼에서 “지난 2년간 사회주의적 실험이 한국 경제의 ‘야성적 충동’을 죽여 개집에 갇힌 신세가 됐다”고 비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적 실험’ ‘개집’ 같은 험악한 비유가 넘쳐나고 있다.
 
정부가 내놓는 대책도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 정부에 권고한 정책은 거의 얼개가 흡사하다. 중장기적 성장을 위해 구조조정과 노동개혁·규제완화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날 단기적인 경기 침체와 실업은 재정 확대와 금리 인하로 대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민주당은 정치적으로 손해 볼 구조조정·노동개혁·규제완화는 외면하고 맨 마지막의 단기대책인 재정 확대만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고 있다. 달콤한 포퓰리즘이다.
 
이번 일본 대책도 마찬가지다. 소재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라는 낡은 레코드판만 돌릴 뿐 ‘죽창’ 든 ‘의병’들의 불매운동이 거의 유일하다. 새로 내미는 카드들은 모두 양날의 칼이다.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는 미국을 움직이는 데 효과적이지만 만약 미국이 반대하면 한국은 동북아의 외톨이가 된다. 독도 군사 훈련도 마찬가지다. 독도 재단 홈페이지에는 왜 의무경찰이 독도를 지키는지 잘 설명해 놓았다. “통상적으로 군대는 분쟁이나 위험 지역에 주둔한다. 만약 독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면 국제 사회가 분쟁지역으로 오인할 수 있고 일본이 자위대 군함을 파견할 빌미를 준다. 경찰의 주둔은 이미 우리 영토라는 확고한 인식 때문이다.”
 
요즘 청와대와 진보진영은 내부 단속에 더 열을 올린다. 일단 정부에 대한 비판부터 차단한다. 지난해 소득주도 성장이 실패하자 “경제위기론은 보수기득권층의 음모”라고 핏대를 올렸다. 경제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정부에 대한 불신이나 정책 흔들기로 몰아붙였다. 이번에도 ‘블랙 먼데이’가 덮치자 청와대는 ‘경제 위기설’은 일본이 의도한 것이고, 이를 언론이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문제라고 선을 그어 버렸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문 대통령이 꺼낸 카드다. “남북간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야당에선 “뜬금없는 몽상가의 허풍”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제 수석회의에 앉자마자 “시작할까요?”라고 운을 뗀 뒤 곧바로 A4 용지에 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말 실수가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발언이라 봐야 한다.  
     
올해 초부터 이어진 일련의 흐름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지난 3월 문정인 외교안보특보는 “문 대통령은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자 (남북) 평화 이니셔티브에 베팅한 것”이라며 “이런 외교적 돌파구가 없다면 내년 총선에서 문 대통령은 주눅이 든 채 불확실한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다”며 천기를 누설했다. 지난주에는 여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일본에 강경 대응해야 내년 총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자료를 돌렸다. 어쩌면 문 대통령의 ‘남북 경협’ 카드도 내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위한 밑밥을 뿌린 것인지도 모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제기한 “집권 여당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가석방-북한 김 위원장 답방의 내년 총선 필승 시나리오가 나돈다”는 음모론을 필자는 빈말이라 믿고 싶다. 문 대통령이 한일 경제전쟁을 내년 총선용으로 이용하는 순간 국민적 신뢰가 무너지고, 신뢰를 잃으면 전열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국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전투를 앞두고 싸움을 망설이던 북군 사령관 미드 장군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미드 장군! 이 전투가 성공하면 모두 당신의 공이오. 그때는 이 편지를 바로 찢어버리시오. 만약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소. 장군은 단지 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그 증표로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시오. -에이브러햄 링컨” 이렇게 최고 지도자가 모든 정치적 계산과 사심을 내려놓았을 때 북군은 죽기 살기로 싸웠고, 결국 승리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 [이철호 칼럼] 문 대통령의 A4 용지와 링컨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