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 학회에 참석하느라 북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지방에서 인천공항까지 이동, 12시간 가까운 비행, 경유지의 지겨운 기다림, 또다시 국내선 비행. 집을 떠난 지 거의 24시간 후에 도착한 호텔방 창문을 여는 순간 몸과 마음의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듯했다. 깨끗한 공기 덕분만은 아니었다. 잘 정돈된 우아한 건물과 도시를 가득 채운 나무. 마치 영화 한 장면을 보는 듯했으니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와 복지, 자유와 평화, 그리고 환경과 문화를 자랑하는 북유럽 국가. 도대체 그런 '천국' 같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걱정이 있을까? 글로벌 자유경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혼란의 2019년. 북유럽 시민들은 본인들이 세계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매트릭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평화가 얼마나 예외적인지 잘 알고 있기에, 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해서라도 무시하고 막아보려 발버둥치는 듯했다. 선거 때마다 점점 많은 표를 얻는 반(反)이민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관한 소식이 가득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의 사이비 책 '위대한 인종의 죽음'에나 등장했을 만한 인종주의적 주장이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번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노르딕', 그러니까 북유럽 인종의 정체성이 타 인종과 이슬람 때문에 '더럽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자기가 살고 있던 '아름다운' 세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선택해야 했다. '파란 약'을 먹고 계속 환각의 세상에 머무를지, 아니면 '빨간 약'을 삼키고 잠에서 깨어나 참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지. 북유럽 시민들도 이제 서서히 빨간 약에 적응하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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