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산책 사랑은 유별나다. 시간을 내서 좋은 산책로를 찾아 걸으며 사색하는 것이 친숙한 일상이다. 국가가 지정한 '공공 산책로(public footpaths)'가 전국에 펼쳐져 있고 산책용 지도도 아주 잘 구비되어 있다.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큰 땅을 가진 나라들보다도 걸을 수 있는 길이 훨씬 많다. 개인 사유지라도 공공 산책로로 지정된 길은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입구에 문을 만들어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길의 권리(right of way)'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수백 년간 지켜져 온 법이자 규범이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가축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장치가 되어있는 산책로 입구의 문은 '키싱 게이트(kissing gate)'라고 불린다. "입술을 살짝 대다"라는 이름처럼 실제로 영국인은 키스의 시작과 같은 설렘으로 이 문을 열고 산책을 시작한다. 시골길 산책은 목초지, 날아가는 새, 풀 뜯는 말, 부드러운 바람과의 친절한 만남을 준다. 나뭇잎 사이로 투영되는 햇빛을 느끼며 걷다 보면 가끔 작은 마을도 지나간다. 마주치는 주민들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인사를 건넨다. 길을 걸을 때는 시간의 질도 다르게 느껴진다. 알려진 것처럼 영국의 날씨는 자주 흐리고 비도 많이 온다. 산책길은 종종 축축하게 젖어 있다. 하지만 영국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쁜 날씨는 없다. 옷을 잘못 입었을 뿐이다"라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말처럼 그저 옷을 챙겨 입고 장화를 신으면 된다. 이런 정서와 산책의 문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헌터(Hunter) 장화다. 1856년 시작된 이 브랜드는 세계 대전 때 군용 장화로도 쓰였다. 전통 있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조정 경기 때도 선수들은 젖은 강기슭을 이 장화를 신고 걸어 내려간다. '영국의 경관 에 가장 잘 어울리는 브랜드'라는 말처럼 자신의 산책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필수 장비로 사랑받으며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영국의 시골을 여행해보면 호텔마다 산책길 지도가 있고 현관 입구에 치수별로 헌터 장화를 마련해 두는 장면을 자주 본다〈사진〉. 산책길이라는 자신들의 멋진 공간, 그리고 그곳을 즐기는 스타일을 방문객들과 나누는 근사한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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