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0> 20여 년 전, 도쿄 메이지 신궁 인근 굴 속에 있는 양복점에서 말 많은 중국 퇴역 군인 만난 적이 있다. 장소가 굴 속이라 그런지 방공호 얘기가 그치지 않았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쟁 나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중국은 땅 덩어리가 넓은 나라다. 숨을 곳이 많다. 전쟁 끝나는 날까지 도망만 다니면 된다. 우리 마을에 그런 사람들 많았다. 산속에 가면 몇 년 살아도 안전한 굴이 널려있다. 거의가 전란 피하기 위해 인공으로 만든 것들이다.” 일화도 곁들였다. “우리 할아버지 친구 중에 멋쟁이가 있었다. 옆집 유부녀와 야밤에 도망쳤다. 항일전쟁 발발 직전이었다. 굴속에 묵으며 명산대천 유람하다 보니 8년간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몰랐다. 부인과 유부녀의 남편이 재혼했다는 소문 듣고 하산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에도 비슷한 사람이 있다. 워낙 유명 인사라 성명은 생략한다. “우리는 만리장성 쌓은 민족이다” “엄청난 희생 있었지만 실패는 아니다” 상대가 한국인이다 보니 6·25전쟁과 갱도(坑道)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일본군 얘기부터 했다. “갱도전술은 보급이 보장돼야 한다. 태평양 전쟁 시절, 태평양 도서(島嶼)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갱도전술로 미군의 포화에 대응했다. 효과는 잠시였다. 미군함대가 도서를 포위하자 탄약과 양식, 병력 충원이 불가능했다. 보급이 단절된 일본군은 속수무책. 거친 숨 몰아 쉬며 갱도에서 나오는 순간 폭사했다. 양팔 번쩍 들고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칠 틈도 없었다. 항미원조 때 지원군도 갱도전술을 썼다. 엄청난 희생이 있었지만 실패한 전략은 아니었다. 천껑(陳賡·진갱)의 공로가 크다.” 중국지원군은 참전 1년간 다섯 차례 대형 전투를 치렀다. 1951년 여름, 사병들이 만든 말발굽 모양의 소형 갱도가 추계 방어전에서 빛을 봤다. 정전담판이 시작되고 전선이 38선 일대에 고착되자 피아는 진지전에 들어갔다. 지원군 총부 부사령관과 3병단 사령관을 겸임한 천껑은 사병들의 창조물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진지를 고수하기 위해 갱도, 참호(塹壕), 교통호(交通壕) 수축을 구상했다. 8월 26일 일기를 소개한다. “전쟁의 모든 조건이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했다. 운수 조건도 개선 중이다. 사병들의 굶주림도 과거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휴식도 훈련이다. 2개월간 쉬면서 체력도 회복됐다. 전술의 변화가 절실하다. 우리는 만리장성을 쌓은 민족이다.” 이틀 후인 28일, 3병단 예하 15군을 방문했다. 군단장 친지웨이(秦基偉·진기위, 1980년대 국방 부장 역임)와 정치위원 구징셩(谷景生·곡경생, 보시라이의 장인이며 최근 대형 사고친 구카이라이의 부친)에게 지시했다. “미국은 정치와 군사가 한통속이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이민들이 구성원이다. 주관보다 객관을 존중하고 변화에 능하다. 소홀히 대할 상대가 아니다. 지구전 펼 수 있는 갱도를 건설해라. 말발굽에 고양이 귀 모양을 첨가해라.” 천껑은 갱도건설을 전 지원군에 확산시켰다. 마오쩌둥이 대규모 갱도 건설을 승인했다. 38선 이북에서 대 역사(役事)가 벌어졌다. 미군 쪽에서 날아온 포탄 중에는 불발탄이 많았다. 해체하고 화약을 긁어 모았다. 동북 인민정부와 동북군구(東北軍區)도 분주했다. 건설 자재와 장비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았다. 지상과 공중에서 퍼붓는 미군의 포격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음악보다 포성이 더 익숙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조차 “이렇게 무서운 전쟁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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