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38선 이북에 6250㎞ 땅굴 판 중국군 “난공불락, 지하장성”

bindol 2019. 12. 28. 10:06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0>

베트남 부총리 겸 국방부장 응우엔 잡(오른쪽 셋째)과 함께 공군 실험실을 둘러보는 천껑(오른쪽 다섯째). 1955년 11월 하얼빈, 중국인민군사공정학원 [사진 김명호]

베트남 부총리 겸 국방부장 응우엔 잡(오른쪽 셋째)과 함께 공군 실험실을 둘러보는 천껑(오른쪽 다섯째). 1955년 11월 하얼빈, 중국인민군사공정학원 [사진 김명호]

20여 년 전, 도쿄 메이지 신궁 인근 굴 속에 있는 양복점에서 말 많은 중국 퇴역 군인 만난 적이 있다. 장소가 굴 속이라 그런지 방공호 얘기가 그치지 않았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쟁 나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중국은 땅 덩어리가 넓은 나라다. 숨을 곳이 많다. 전쟁 끝나는 날까지 도망만 다니면 된다. 우리 마을에 그런 사람들 많았다. 산속에 가면 몇 년 살아도 안전한 굴이 널려있다. 거의가 전란 피하기 위해 인공으로 만든 것들이다.” 일화도 곁들였다. “우리 할아버지 친구 중에 멋쟁이가 있었다. 옆집 유부녀와 야밤에 도망쳤다. 항일전쟁 발발 직전이었다. 굴속에 묵으며 명산대천 유람하다 보니 8년간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몰랐다. 부인과 유부녀의 남편이 재혼했다는 소문 듣고 하산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에도 비슷한 사람이 있다. 워낙 유명 인사라 성명은 생략한다.
  

“우리는 만리장성 쌓은 민족이다”
천껑, 정전담판 시작되자 착수

불발탄 화약 모아 한겨울 폭파 작업
운송병·장비 손실 컸지만 건설 계속

이듬해 봄 거미줄 ‘지하 요새’ 완성
가공할 미군 화력에 안 밀리고 버텨

“엄청난 희생 있었지만 실패는 아니다”
 

갱도에서 참모와 작전을 숙의하는 15군 군장 천지웨이(오른쪽). 1952년 10월 말, 오성산. [사진 김명호]

갱도에서 참모와 작전을 숙의하는 15군 군장 천지웨이(오른쪽). 1952년 10월 말, 오성산. [사진 김명호]

상대가 한국인이다 보니 6·25전쟁과 갱도(坑道)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일본군 얘기부터 했다. “갱도전술은 보급이 보장돼야 한다. 태평양 전쟁 시절, 태평양 도서(島嶼)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갱도전술로 미군의 포화에 대응했다. 효과는 잠시였다. 미군함대가 도서를 포위하자 탄약과 양식, 병력 충원이 불가능했다. 보급이 단절된 일본군은 속수무책. 거친 숨 몰아 쉬며 갱도에서 나오는 순간 폭사했다. 양팔 번쩍 들고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칠 틈도 없었다. 항미원조 때 지원군도 갱도전술을 썼다. 엄청난 희생이 있었지만 실패한 전략은 아니었다. 천껑(陳賡·진갱)의 공로가 크다.”
 

중공은 항일전쟁 시절에도 굴을 많이 팠다. 1942년 중공 항일근거지 옌안(延安). [사진 김명호]

중공은 항일전쟁 시절에도 굴을 많이 팠다. 1942년 중공 항일근거지 옌안(延安). [사진 김명호]

중국지원군은 참전 1년간 다섯 차례 대형 전투를 치렀다. 1951년 여름, 사병들이 만든 말발굽 모양의 소형 갱도가 추계 방어전에서 빛을 봤다. 정전담판이 시작되고 전선이 38선 일대에 고착되자 피아는 진지전에 들어갔다. 지원군 총부 부사령관과 3병단 사령관을 겸임한 천껑은 사병들의 창조물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진지를 고수하기 위해 갱도, 참호(塹壕), 교통호(交通壕) 수축을 구상했다. 8월 26일 일기를 소개한다. “전쟁의 모든 조건이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했다. 운수 조건도 개선 중이다. 사병들의 굶주림도 과거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휴식도 훈련이다. 2개월간 쉬면서 체력도 회복됐다. 전술의 변화가 절실하다. 우리는 만리장성을 쌓은 민족이다.”
 

갱도에 물자를 운반하는 지원군. [사진 김명호]

갱도에 물자를 운반하는 지원군. [사진 김명호]

이틀 후인 28일, 3병단 예하 15군을 방문했다. 군단장 친지웨이(秦基偉·진기위, 1980년대 국방 부장 역임)와 정치위원 구징셩(谷景生·곡경생, 보시라이의 장인이며 최근 대형 사고친 구카이라이의 부친)에게 지시했다. “미국은 정치와 군사가 한통속이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이민들이 구성원이다. 주관보다 객관을 존중하고 변화에 능하다. 소홀히 대할 상대가 아니다. 지구전 펼 수 있는 갱도를 건설해라. 말발굽에 고양이 귀 모양을 첨가해라.” 천껑은 갱도건설을 전 지원군에 확산시켰다.
 
지원군 총부는 갱도 건설 목적을 분명히 했다. 방공(防空), 방포(放砲), 방독(防毒), 방우(防雨), 방조(防潮), 방화(防火), 방한(防寒) 7가지를 철저히 하라고 주지시켰다. 형식도 통일시켰다. “갱도 입구는 두터워야 한다. 10m에서 15m로 해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 짧게는 100m, 멀어도 500m 이상은 불허한다. 출구도 중요하다. 적어도 2개 이상 만들어라. 갱도의 폭은 1.2m, 높이는 1.7m를 기준으로 한다. 그 이상은 돼도 이하는 안 된다. 내부 시설도 만전을 기해라. 무전실과 사무실 외에 식량 창고와 탄약고, 주방, 화장실, 목욕 시설, 휴게실을 완비해라.”
  
사병들은 파편·쇠붙이 들고 갱도 공사
 

1953년 1월 임진강변을 시찰하는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 왼쪽 첫째). [사진 김명호]

1953년 1월 임진강변을 시찰하는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 왼쪽 첫째).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이 대규모 갱도 건설을 승인했다. 38선 이북에서 대 역사(役事)가 벌어졌다. 미군 쪽에서 날아온 포탄 중에는 불발탄이 많았다. 해체하고 화약을 긁어 모았다. 동북 인민정부와 동북군구(東北軍區)도 분주했다. 건설 자재와 장비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았다. 지상과 공중에서 퍼붓는 미군의 포격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음악보다 포성이 더 익숙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조차 “이렇게 무서운 전쟁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동북에서 보낸 건설 장비는 중도에 손실이 컸다.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운송병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계속 보냈다. 건설 현장의 공병들은 온갖 폭파 방법을 동원했다. 백설이 휘날리는 엄동설한에 폭파 소리가 요란했다. 공병들의 곡괭이와 삽이 허공을 갈랐다. 사병들은 파편과 호미 등 쇠붙이 하나씩 들고 갱도 건설에 나섰다. 공사 도중 미군의 공격이 맹렬해도 전선은 38선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52년 새싹이 돋을 무렵, 눈에 보이지 않는 지표(地表) 밑에 거대한 용이 자리 잡았다. 만리장성에 비견될 사방으로 연결된 6250Km짜리 갱도였다. 금수강산의 땅속을 흉하게 만든 지원군은 환호했다. “우리의 갱도는 지하장성(長城)이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다.” 마오쩌둥은 갱도 완성에 만족했다. 천껑을 귀국시켰다. 스탈린이 제의한 군사기술학교 설립을 맡겼다. 하얼빈 군사공정학원 초대 원장에 임명했다.
 
갱도는 기적을 연출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날까지 미군의 화력에 밀리지 않았다. 보급선도 단절된 적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