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8〉 1983년 5월 5일, 납치당한 중국민항 296호가 춘천 미군 공항에 불시착했다. 이 사건은 여러 의미가 있었다. 한·중 수교의 밑거름뿐만 아니라 중국의 치안을 바로잡는 옌따(嚴打·엄하게 때린다)의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주범 쭤창런(卓長仁·탁장인)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문혁이 발발하자 홍위병 완장을 찼다. 글과 말을 앞세운 ‘홍위병 운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무투(武鬪·무장투쟁)가 시작되자 온 나라가 따라 했다. 몽둥이가 춤을 추더니 총과 수류탄이 등장하고, 심한 곳은 장갑차까지 동원했다. 1983년 납치 주범은 홍위병 출신 평소 따르던 패거리 4명과 범행 저질러 공장 노동자 쭤창런은 무투가 체질에 맞았다. 타고난 조직력을 갖추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공은 컸지만, 머리에 든 게 없었다. 지식인들에게 시키던 교육을 받고 사무직으로 전직해 랴오닝성 기전설비공사(機電設備公司) 기획원 자리를 꿰찼다. 얼핏 보기엔 유배지나 다름없었지만, 랴오닝성의 차량 구매와 분배의 대권을 장악한 요직이었다. 무슨 조직이건 차량 배당을 받으려면 ‘자동차 대왕’ 쭤창런의 도움이 필요했다. 광저우(廣州)에는 바다를 통해 몰래 들여온 차량들을 헐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쭤창런은 선양과 광저우를 오가며 인맥을 쌓았다. 지방 관리들은 푼돈에 약했다. 5일 새벽 6시 30분, 잠에서 깨어난 선양체육학원 조직부장 안궈루이(安國瑞·안국서)는 평소대로 라디오부터 켰다. 뉴스를 듣던 중 책상 위에 있는 밀봉된 편지 봉투를 발견하자 저절로 손이 갔다. 아들이 부모 앞으로 남긴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생업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납니다. 저를 영원히 망각하시기 바랍니다.” 안궈루이는 대경실색했다. 짚히는 바가 있었다. 원장에게 보고했다. 놀라기는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학원으로 달려갔다. 보위가 간사에게 안궈루이의 아들이 권총을 빌려 갔다는 말 듣자 기겁했다. 허겁지겁 금고를 열었다. 권총이 한 정도 없었다. 안궈루이와 함께 기차역으로 차를 몰았다. 베이징발 열차가 떠난 직후였다. 쭤창런은 항공 지식이 풍부했다. 준비했던 항공지도 꺼내 유심히 보더니 90도 방향으로 향하라며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단둥(丹東)에 착륙하려 하자 내 목에 총구를 댔다. 비행기가 국경을 넘었다. 13시 30분 북조선 영공에 진입했다. 평양 상공에서 하강준비를 하자 어디냐고 물었다. 한청(漢城)이라고 하자 나를 죽일 기세였다. 승객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오후 2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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