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1〉 국민당은 대만에 딴살림 차린 직후부터 대륙과 접촉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1950년 5월,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 진공이 임박했을 때였다. 목적은 시간 끌기였다. 몇 주일 후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 참전을 결정한 미군이 대만해협을 봉쇄했다. 중공의 대만해방은 수포가 되었다. 밀사는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 터져 대만해협 봉쇄 1954년 9월, 샤먼(廈門)의 해방군 포대가 진먼다오(金門島)를 포격했다. 이듬해 1월, 중국인민해방군 화동군구가 저장(浙江)성 연해의 장산다오(江山島)를 점령했다. 장산다오는 국민당 군이 주둔 중인 다천다오(大陳島)의 병풍 격이었다. 미 7함대가 대만의 국민당 군과 합동작전을 폈다. 항공모함 6척을 포함, 159척을 동원해 연합함대를 꾸렸다. 숨넘어가기 직전인 노인 한 명을 제외한 국민당 정규군 1만명과 유격대 4000명, 주민 1만7000여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4만톤에 달하는 군용물자와 마을마다 있던 신상(神像), 부두에 있던 어선들은 쓰레기로 만들어버렸다.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공산당 특유의 전술을 폈다. “미국이 대만해협에 긴장을 조성했다. 양안간의 모순은 국내문제다. 우리는 국·공관계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원한다.” 4월에 인도네시아 반둥에 아시아 아프리카 27개국 국가원수들이 모였다. 중국 대표 저우가 묘한 발언을 했다. “대만해협의 위기는 미국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담판할 용의가 있다.” 긴장을 완화하자는 의미였다. 미국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4개월 후, 제네바에서 미·중 대사급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바르샤바로 자리를 옮긴 대사급 회담은 1970년 2월 20일까지 136차례 열렸다. 장제스는 냉철했다. 8월 21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공산 비적들의 최고투쟁 원칙은 음성적이고 탄력이 있다. 고정된 원칙이 없고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뻔뻔함은 기본이다. 곰팡이처럼 파고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철저히 단절하고 봉쇄하지 않으면 우롱당한다.” 차오쥐런은 2개월간 대륙에 체류했다. 저우언라이와 통전부장에게 대륙의 대만 정책을 듣고 장제스의 고향도 찾아갔다. 장제스의 선영과 장징궈의 생모 묘소에 참배하고 사진도 찍었다. 차오는 본직이 기자였다. 전쟁 시절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쳤다. 취재라면 몰라도 밀사로는 문제가 많았다. 홍콩에 돌아오자 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신문에 연재했다. 장징궈는 부친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차오쥐런은 쓸모가 있다. 앞으로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대륙에 파견해라. 대륙에서 맺은 인연을 꼭 쥐고 있으라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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