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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세상에 나가 '출세'를 하고 싶은 것도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은둔'하고 싶은 욕망도 존재한다. 출세와 은둔. 음양의 이치와 같다.
몸에 큰 병이 들고 경제적으로 파탄이 나서 부득이 은둔하는 수가 있다. 이 경우에 대개는 산에 들어가 판잣집 짓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인생이 파탄 나야만 입산(入山)이 이루어진다. 절처봉생(絶處逢生)에 해당한다. 막다른 궁지에 몰렸지만 어떻게든 살길이 생긴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에 대패한 이후로 전라도 지역의 동학 참여자에 대한 일본군의 철저한 수색과 토벌이 있었다.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모악산 대원사에 숨었던 강증산은 살육의 공포와 분노를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추스른 뒤에야 산신각에서 기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원사 은둔이 이후에 강증산의 종교적 폭발로 이어졌다.
정치적 시효가 다하거나 또는 궁지에 몰렸을 때에도 은둔하는 수가 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이 80년 이후로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가마에 은둔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나왔으면 돈 뺏기고 몸 뺏겼을 가능성이 높다. 노태우 정권 때 총리를 지냈던 노재봉 교수도 요즘 통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언론에 나와서 한마디씩 할 법한데도 일절 언급을 안 하고 사는 것도 은둔의 유형이다. '소은(小隱)은 산에 들어가는 것이요, 대은(大隱)은 도시 가운데에 숨는 시은(市隱)이다'라는 말이 있다. 노재봉은 시은인가?
지리산 화개 골짜기를 20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신흥사 터가 나온다. 절터 앞의 계곡 바위에는 최치원이 글씨를 새겨 놓은 세이암(洗耳岩) 바위가 있다. 흐르는 계곡물에다가 귀를 씻고 싶다는 말씀이다. 세상 정치 이야기가 얼마나 거지같이 느껴졌으면 계곡물에 귀를 씻고 싶다고 하였겠는가! 이 양반이 가야산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갈 때도 남긴 시구가 생각난다.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이라. 내 한번 청산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필자는 신문 칼럼을 쓰니까 세상 사에 세세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허망하고 피곤하기만 하다.
최치원 세이암 바위 맞은편에는 좋은 야생 차 밭이 하나 있다. 녹색 찻잎을 따서 입을 개운하게 하고 싶다. 구척재(口滌齋)라는 이름의 다실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입을 세척하는 집이다. 세이암 옆에는 구척재가 있어야 대구(對句)가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7/20200607023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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