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출입기자들과의 산행길에서 캐나다 전·현직 총리 이야기를 꺼냈다. “멀로니, 크레티앵, 마틴 중 누가 소신 있는 지도자냐.”
재정 확대 흐름 돌이킬 수 없다면 ‘보편 증세’ 필요 당당히 설득해야 부담된다고 언제까지 피할 건가
보수당의 브라이언 멀로니 전 총리는 1991년 연방부가세 도입을 강행했다. 고질적인 재정적자 타개책이었다. 2년 뒤 총선에서 장 크레티앵이 이끄는 자유당에 참패했다. 169석 의석이 단 2석으로 줄어드는 ‘궤멸’ 수준이었다. 막상 집권한 크레티앵 총리는 부가세 철폐 공약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없던 일로 해버렸다.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고, 인기가 높아진 재무장관 폴 마틴이 2003년 다음 총리가 됐다. 노무현은 “멀로니는 당을 몰락시킨 대신 캐나다 재정을 구했다”고 했다.
노무현의 물음은 국가 지도자로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국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러기엔 그의 인기가 너무 낮았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제안했던 ‘대연정론’처럼 뜬금없는 소신쯤으로 여겨졌다.
21대 총선에서 돈의 위력을 절감한 여야가 팔을 걷어붙이고 재정 확대 경쟁에 나섰다. 보수 야당에서 기본소득 논의를 주장하고, 청와대가 “아직 이르다”며 물러서는 기현상까지 나타났다. 한국판 뉴딜, 사상 최대 추경 등 어떻게 쓰겠다는 이야기는 난무하는데, 어떻게 채워넣겠다는 말은 찾기 힘들다.
당장은 적자 국채 발행으로 메우지만 근본 방안이 될 수 없다. 재정 문제의 단기 해결책은 국채 발행이지만, 장기 해결책은 조세라는 것은 상식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 아니더라도 증세는 언젠간 맞닥뜨려야 할 숙제다. 하지만 증세는 사실상 금기어가 됐다. 여당과 국책기관 일각에서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때가 아니다”는 청와대 말에 쑥 들어갔다. 보수정권 때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공격하던 친여 지지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투입 없는 산출은 마술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언젠가 선순환할 것’이라는 주문으로 버티는 지금의 재정 및 복지 정책은 마치 마술 같다.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에서 악의 화신 ‘볼드모트’는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다. 지금 ‘증세’가 그 꼴 아닌가.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증세 카드를 꺼냈다가 망한 정권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은 소비세 도입 혹은 인상 때마다 정권이 붕괴했고, 노무현과 박근혜 정권 권력 누수 배경에도 세금 문제가 있었다.
쉬운 방법은 부자 증세다. 정치적 효과도 좋다. 문재인 정부 초기 ‘핀셋 증세’가 그랬다.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 구간을 신설해 세율을 높였다. 하지만 지금 재정 문제가 부자 증세쯤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세수 효과도 적지만, 지금 경제 상황에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카드다. 부자 증세의 부작용은 ‘세금 망명’이 꼬리를 이었던 올랑드 정권의 프랑스에서 이미 확인됐다.
보편 복지에 맞는 증세, ‘보편 증세’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근로소득 면세자 비율은 40% 정도로, 일본·캐나다·호주 등 주요 선진국의 두 배 이상이다. 이들에게 단돈 1만원의 세금이라도 내라고 설득할 용기가 없으면 보편 복지의 꿈은 마술 아니면 위선일 뿐이다. 그런 용기가 있어야 부자 증세도 설득력을 갖는다. 당당히 복지를 요구하고, 그 대신 모든 국민이 세금 납부 의무를 지자는 것이 국민개세(皆稅)의 정신이다. 이를 위해 나섰던 정부는 지금껏 없었다.
당장 세금을 올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정 확대 흐름은 당분간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증세는 복잡하고 힘든 문제다. 격렬한 사회적 충돌이 따르기 마련이다. 지금 최소한의 공감대라도 이뤄놓지 않으면 갈등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을 수 있다. 177석의 힘을 국정 독주에 쓸 게 아니라 ‘악의 이름’을 불러내 당당히 맞서는 데 써볼 만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