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데모치…' 암호 같은 방송국 언어

bindol 2020. 6. 13. 06:25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어깨 빼야지" "배꼽 바꿔줘" "다리 좀 잘라주세요". 이 무슨 살벌한 말일까?

사실 이건 PD가 돼 처음 들었던 선배의 큐 사인이다. 왠지 신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 이 말들은 풀어보면 "앵커 DVE(앵커 어깨 위에 나타나는 사각형 화면) 빼라" "하단 자막 바꿔줘" "카메라 줌인 해주세요"란 말이다. 하루 수십번씩 외치는 큐 사인이니, 제작진끼리 일종의 '암호'를 쓰는 것이다.

어느 직장이나 구성원만의 '암호'가 있듯 방송에도 제작진만 알아듣는 말이 있다. 또 같은 뜻이라도 방송국마다 부르는 말이 다른 경우도 있는데, 가령 기자 중계 화면을 어느 방송국은 그냥 '중계 DVE'라 부르는 반면 어느 방송국은 '갈라치기'란 생소한 말을 썼다. 화면이 둘로 쪼개진 모양이라 누군가 장난스럽게 쓰기 시작한 게 그냥 굳어졌다. 한 방송국에선 전화선을 이용한 중계 장비를 생뚱맞게 '오케바리'라 불렀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아무도 모르면서도 꽤 오랫동안 그 말을 썼다. 방송국마다 쓰는 언어가 다르니 이직을 하면 이 '암호'를 익히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방송국의 '암호' 속엔 일본식 표현도 적지 않게 숨어 있다. "출연자 키가 안 맞으니 '니주' 좀 깔아 봐" "카메라 감독님께 거긴 '데모치'로 찍어 달라고 해". 선배가 마구 쏟아내는 지시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허둥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니주'가 '발판'이고, '데모치'는 '카메라를 들고 찍기'란 걸 알게 됐지만, 처음엔 이런 일본식 표현을 못 알아들어 일을 못 할 지경이었다.

 

작가들과 회의할 때도 일본식 표현이 난무했다. "이 '구다리'는 그냥 날려요" "여기서 '마' 뜨면 큰일인데". 신기한 건 이땐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거였다. '구다리'는 단락, '마'는 간격이란 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대충 감이 잡혔다. 기술 용어가 아니라 눈치껏 학습이 된 모양이다.

예전엔 이런 일본식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전문적이고 노련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암호'인 척 섞어 쓰며 허세를 부렸지만, 이젠 부끄러운 일이란 걸 안다. 제작진 스스로 고쳐나가야 할 습관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2/20200612044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