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한조각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63] 일본이 한 수 배우고자 했던 상대

bindol 2020. 8. 1. 09:21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03~1817년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장이었던 헨드릭 두프는 일본 사정에 정통한 서양인이었다. 쇼군을 알현하기 위해 에도를 방문해야 했던 그는 에도 체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일본 의사들과 천문학자들은 우리를 몇 번이고 찾아왔다. 그들의 지적 욕구는 엄청났다. 양약(洋藥)의 효능·재료·제법에 대해 상관의(醫)에게 꼬치꼬치 물었고, 질문을 세심하게 준비해 왔다. 천문학자들은 랄랑드(Lalande)의 '천문학 개론(Astronomie)' 등 유럽의 천문 서적을 보물처럼 여겼고 수많은 질문을 했다. 1810년 두 번째 방문 땐 나가사키에서 나의 제자였던 통역사 바바 사주로를 만났다. 사주로는 자신을 '아브라함(Abraham)'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에도 친구들이 네덜란드식 이름을 갖기를 원한다며 내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중에 매일같이 몰래 나를 찾아오던 천문방(天文方·막부의 천문 관청 책임자) 다카하시 삼페이가 있었다. 1817년 일본을 떠날 즈음 나는 그에게 '요하네스 히오비위스(Johannes Giobiu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울러 쇼군의 전의(典醫)인 가쓰라가와 호안에게는 '요하네스 보타니퀴스(Johannes Botanicu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통신사가 가는 곳마다 시문(詩文)을 받으려는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그를 이유로 일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이 한 수 배우고자 한 상대는 조선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 서양을 가리지 않고 배울 것이 있는 상 대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가르침을 청했다. 기존 지식에 안주하지 않고 실용적 태도로 탐구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지적 풍토가 일본 개화(開化)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다.

 

겸허한 자세로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려 했을 때 일본은 발전했고, 자만하여 폐쇄적 우월 의식에 빠졌을 때 쇠락하고 자멸했다. 비단 일본뿐 아니라 시대와 국가를 가리지 않는 보편적인 교훈일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16/20200416042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