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선생 일가의 한글 편지를 모아 펴낸 '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와 어머니'를 읽었다. 그 모친의 편지 한 대목. "어느 누가 아들이 없으랴만 남다른 자식을 이 겨울철에 내어놓고 잠자고 밥 먹고 똑같이 지내니, 사람의 욕심이 흉하지 아니하냐. 밤낮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지금 들으니 네가 그저 방 속에 누워 있더라고 하니, 앓는 것을 속이는 것인지 간장이 녹을 지경이다. 빨리빨리 바른대로 편지 부쳐 쾌차한 것을 알게 하여라." 사연도 사연이려니와 그 낡은 종이쪽을 오롯이 간직한 그 정성이 놀랍다.
책 앞쪽에 40수의 '자모사' 시조 연작이 실렸다. 고교 시절 배운 글이라 왈칵 반갑다. 그중 제5수. "반갑던 님의 글월 설음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 하여라." 어머니 생전 편지를 얼굴에 대니 그 뜨거운 정이 얼굴로 스며 마음에 밴다. 제19수는 이렇다. "어머니 부르올 제 일만 있어 부르리까./ 젖먹이 우리 애기 왜 또 찾나 하시더니/ 황천이 아득하건만 혼자 불러 봅니다."
위당이 어머니께 올린 편지. "보는 대로 모두 사 보내고 싶사오나, 마음과 같지 못해 해삼 홍합 조금 사 보냅니다. 해삼이 두 봉인데 바깥에 싼 것은 어머님 고아 잡수시고, 속 상자에 넣은 것은 아버님 약 할 것입니다. 석란젓은 사방으로 구하여도 없어서 어란을 조금 사 보내옵나이다." 추신에는 "송이 찌개가 좋다하시기에 더 사 보내오니 잡수시옵소서"라고 썼다.
셋째 따님 정양완 선생이 1945년 가을 어머님께 보낸 편지의 한 대목. "어머니가 해 보내신 솜저고리는 어머니 냄새가 나는 듯하고 폼신폼신하고 따뜻합니다. 학교 공부도 재미있고, 어머니가 보시면 인제는 칭찬하실 거예요. 학교에서 반에 부원이 되고 학교 도서부의 전교 서기가 되었어요. 어머니, 등을 치며 칭찬해 주세요.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아! 사랑스럽다.
부모가 부모의 자리를 못 지키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한 세상이다. 사람은 본 대로 하고 배운 대로 산다. 지단의장(紙短意長)! 짧은 종이에 담긴 긴 뜻이 묶여 가풍을 이루고 역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