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형(權衡)은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권(權)은 저울추, 형(衡)은 저울대다. 권형은 저울처럼 공평한 인물을 말한다. 세종(世宗)은 황희(黃喜) 정승이 사직을 고하자 “조정에 의심이 생기면 경은 시귀(蓍龜·점칠 때 쓰는 가새풀과 거북으로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였고, 정사와 형벌을 논할 때면 권형이었다”며 반려했다.
권형은 ‘저울질하다’는 동사다. ‘평형을 맞추다’는 뜻도 있다. 권력의 밸런스를 맞추는 정책을 권형책(權衡策)이라 한다.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능했다. 남양(南陽) 호족 출신 유수는 영천(潁川)을 거쳐 홀로 황하(黃河)를 건넜다. 하북(河北)의 지방 세력과 경합하며 제국을 세웠다. 건국 후 하북파를 견제하기 위해 적계(嫡系)인 남양파와 준적계인 영천파를 키웠다. 세 파벌을 정립(鼎立)시켜 둘로 하나를 통제했다. 궁궐 운대(雲臺)에 새긴 개국공신 28명도 남양파 11명, 하북파 10명, 영천파 7명으로 균형을 맞췄다.
집권 말 영천파의 핵심 장군 둘이 세상을 뜨자 정립이 흔들렸다. 유수는 두융(竇融)을 중용해 하서(河西) 파벌을 만들었다. 하서·영천파를 아울러 정립을 유지했다. 패착(敗着)이었다. 광무제가 죽자 하서파가 득세했다. 두융의 증손 두헌(竇憲)의 누이가 3대 황제 장제(章帝)와 결혼하자 외척 세력이 부활했다. 외척의 발호는 전한이 망한 이유였다. 4대 화제(和帝)는 환관과 연대해 두헌을 제거했다. 화제는 이미 쇠락한 남양파 등(鄧)가를 외척으로 삼았지만 하서파와 겨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환관과 외척의 다툼이 이어졌다. 국정을 농단한 열 명의 환관(十常侍·십상시, 『후한서』에는 12명)이 발호하면서 『삼국연의』의 난세가 시작됐다.
권형술은 어렵다.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척결(剔抉)을 택했다. 개국 수장(首將)이자 사돈의 가족까지 주살(誅殺)하며 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송(宋)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민심에 기대 공신 세력을 눌렀다. 술 한잔으로 공신의 병권을 몰수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에 성공했다. 권신(權臣) 사이의 다툼이 요란하다. 역사 속 반면교사(反面敎師)가 아쉬운 요즘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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