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가을 저녁의 운치[이준식의 한시 한 수]〈33〉

bindol 2020. 9. 1. 15:54

山居秋暝 / 王維(산장의 가을 저녁)

 

空山新雨後  공산신우후
天氣晩來秋  천기만래추 
明月松間照  명월송간조 
淸泉石上流  청천석상류 
竹喧歸浣女  죽훤귀완녀 
蓮動下漁舟  연동하어주 
隨意春芳歇  수의춘방헐 
王孫自可留  왕손자가류 

 

 

 

 


無欲 혹은 物我一體의 경지에서 혼연히 자연 속에 몰입되었다는 토로일 터다.
자기 존재나 모든 행위마저 자연의 일부로 끌어들였을 때나 가능할 법한 발상이다.
심경이 그러하니 설령 꽃이 다 져버렸다 해도 마냥 산속에 머물 수 있다.


가을 기운이 완연한데 느닷없이 봄꽃 타령이라니,
다소 뜬금없다 싶기도 하지만 시인이 즐기는 자연의 멋이 俗人의 그것과는
결이 다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겠다.


王孫은 귀족 자제 혹은 은둔자라는 의미인데
이 비유 속에는 자신을 자연의 섭리와 空寂에 고스란히 맡겼다는
자긍심 같은 게 담겨 있다.

제3구와 4구, 제5구와 6구는 각각 서로 對句로
짝을 맞추는 게 律詩의 정형이라,
번역도 낭송의 리듬을 살려 글자 수가 대칭되게 바꾸어 보았다.


왕유는 당대 산수시의 鼻祖로 불릴 만큼 담담하면서
운치 있는 시풍을 자랑했고 산수화에도 뛰어났다.
서예와 음악에 정통했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詩佛로 불리기도 했다.

소동파는 “그의 시를 음미하면 그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을 볼라치면 그 속에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시중유화, 화중유시)”고 평가했다.


-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