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엽전 주머니◈
한양에서 별감이 내려왔다.
별감이라야 대수로운 벼슬도 아니지만 이 동네에서는 가장 출세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함께 뒹굴고 서당에서 공부하던 고향친구들이 모였다.
별감은 목이 뻣뻣해졌고
고향친구들이란 작자들은
낯 뜨겁게 아부질이다.
“별감 나리, 신수가 훤하시네.”
눈을 내리깐 별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 이름이 용천, 아니 영철이던가.”
고향 떠난 지 3년도 안돼 친구 이름까지 까먹었다.
“용철이네.”
“아, 그래 용철이. 자네 훈장님한테 매도 많이 맞았지.”
옆에 있던 기생 도화가 까르르 웃었다.
꽃 피고 새 우는 화창한 봄날,
집안이 넉넉한 친구 셋이 별감 친구를 모시고(?) 화전놀이를 가는 참이다.
한 친구는 10년 동안 땅 속에 묻어뒀던 산삼주를 꺼내왔고 한 친구는 씨암탉을 잡고
산적에다 화전을 부칠 준비를 해오고 나머지 한 친구는
기생 도화를 돈을 주고 데려왔다.
앞장 선 도화가 어깨춤을 추며 산길을 오른다.
진달래꽃은 불타고 개울엔 콸콸 옥수가 흐르고 산새는 울고
하늘은 맑고 봄바람은 분다.
그들은 목적지 마당바위 앞에서 딱 걸음을 멈췄다.
“껄껄껄, 여기는 어인 일인가?”
해진 갓을 삐딱하니 쓰고 장죽을 꼬나문 주정뱅이 해학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먼저 와서 마당바위에 좌정하고 앉아
시치미를 떼고 오히려 별감 일행을 내려다보며 묻는다.
어린 시절 함께 서당에서 공부한 불청객 해학은
별감에게 거리낌 없이 “봉팔이, 너 왔다는 소리는 들었다.”
분위기는 깨졌지만 술판은 벌어졌다.
친구 하나가 기생 도화에게 귓속말로
“10년 묵은 산삼주를 해학이 잔에는 조금씩 따라라.”
도화는 다른 사람들 술잔은 넘치게 따랐지만
불청객 해학의 술잔은 반도 차지 않게 술을 부었다.
소피 보러 숲 속으로 가는 도화를 해학이 따라갔다.
“도화야, 이거 받아라.” 도화는 눈이 둥그래져 엽전 주머니를 받았다.
“도화야, 부탁이 하나 있다.
내가 배탈이 나서 닷새 동안
하루에 죽 한공기로 살았다.
술을 마시면 안되는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내 잔엔 따르는 시늉만 해다오.” ‘어려울 것 없지.
아니어도 그 귀한 술,
해학에겐 조금씩 따르라 했는데.’ 숲 속에 앉아 소피를 보며 도화는
해학에게 받은 돈주머니를 열어봤다.
한지로 돌돌 쌓여 있는 엽전 뭉치가 묵직하다.
한지를 펴던 도화는
오줌발이 똑 끊겼다. 동전이 아니고 모두가 사금파리였던 것이다.
이를 악 다물고 돌아온
어린기생 도화는 너 죽어보라는 듯이
해학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죽을 상을 하고 마신 술잔에
연거푸 산삼주를 따랐다.
호리병이 바닥난 걸 보고
해학은 별감 곁으로 가서 귓속말로 “도화 저년은 건드리지 말게.
내가 한달 전에 합방을 했다가
아직도 매독으로 고생하고 있네.”
지난밤,
도화를 품었던 별감은 울상이 됐다. 트림을 거하게 한 해학이 껄껄 웃으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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