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3〉 소녀 시절 가와시마 요시코는 육군대학 교관 도조 히데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935년 10월 10일 밤,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에 도착한 관동군 헌병사령관 도조 히데키(맨 앞).[사진 김명호] 1900년 5월,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황급히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산시(山西)성 경내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였다. 먼저 와있던 숙친왕 산치(善耆·선기)를 불렀다. “베이징으로 돌아가라. 리훙장(李鴻章·이홍장)과 함께 뒷일을 수습해라.” 청 망하자 상인으로 변장한 숙친왕 숙친왕은 일본군과 교섭에 나섰다. 일본군 통역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와 죽이 맞았다. 숙친왕의 열아홉째 아들 센룽(憲容·헌용)의 구술을 소개한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다. 중학 시절 이미 일본인 체취가 물씬 나는 중국인이었다. [사진 김명호] 16살 때 도쿄 외국어학원에 들어가 중국 고전과 중국어에 매달렸다. 1886년, 22살 때 상하이에 잠입했다. 화동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해안선을 측량했다. 군 배치 상황도 지도로 만들었다. 만주와 내몽고를 중국에서 분열시키자며 ‘만·몽 독립론(滿·蒙獨立論)’을 제창해 군부의 주목을 받았다. 청일전쟁 때는 통역으로 종군했다. 식민지 대만에서 정보 업무에 종사하던 중, 베이징 공격을 앞둔 일본군의 요청으로 8국 연합군에 합류했다. 가와시마는 청나라 정부의 항복을 압박했지만, 만주와 몽고 귀족들의 저택은 철저히 보호했다. 숙친왕의 왕부(王府) 외에는 손상된 곳이 없었다. 왕공(王公)들에게 체면이 선 숙친왕은 가와시마에게 호감이 갔다. 허구한 날 머리 맞대고 밀담을 나눴다. 부인들 앞에서 의형제도 맺었다. 1906년 딸이 태어나자 6년 후 양딸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고 시절 오빠, 동생, 양부와 함께 꽃구경 나온 가와시마 요시코(오른쪽 두번째). [사진 김명호] 숙친왕은 노동자로 위장한 토비(土匪) 2000여 명을 다롄(大連)에서 훈련시켰다. 동북의 일본 영사관과 주둔군이 거사에 제동을 걸었다. “전쟁이 뭔지 모르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이다. 성공은커녕 일본의 국위(國威)만 손상시킬까 우려된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 손을 잡는 것이 제국에 도움이 된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숙친왕의 상대는 베이징의 북양정부가 아닌 장쭤린의 동북군이었다. 군을 출동시킨 바브자브는 중도에 퇴각했다. 하얼빈 인근에서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전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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