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백이 숙제 흉내나 내겠다” 자오얼쉰, 중화민국 요직 고사

bindol 2020. 11. 7. 06:59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0〉

청나라 황실은 몽고를 소중히 여겼다. 몽고사무국(蒙務局)을 두고 정국이 꼬일 때마다 몽무국 책임자(督辦)를 파견했다. 1908년 봄 몽고로 가는 도중 선양 교외에서 모습을 남긴 몽무국 독판 주치첸(朱啓鈐·주계검. 왼쪽 다섯째) 일행. 주치첸은 중화민국 국무총리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청 태조 누르하치는 몽고 여인을 황후와 황비로 맞아들였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였다. 태종 황타이지(皇太極)는 더 심했다. 일후사비(一后四妃), 황후와 4명의 황비가 모두 몽고 여인이었다. 그것도 칭기즈칸의 후예인 황금가족 집안 자매들이었다. 명나라 숭정(崇禎) 8년, 후금(後金) 천총(天聰) 9년, 도르곤(多爾袞)이 지휘하는 원정군이 몽고의 차하르(察哈爾)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보물을 손에 넣었다.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 제안에
“칭다오를 수양산으로 알고…”

국사관 관장직은 조건부 수락
15년간 청 역사서 편찬에 매진

청, 베이징 입성 후 만주 성역화
혈통 보존하려고 한족 이주 금지

명·만주·몽고 세력 간 ‘정치 삼국지’

1926년 4월 베이징의 기업과 금융기관 연합회는 임시치안회를 조직, 장쭤린의 입경을 권하기로 합의했다. 앞줄 오른쪽 여섯째가 자오얼쉰. [사진 김명호]

보통 보물이 아니었다. 전승되는 일화를 소개한다. “한(漢)나라에서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까지 황제를 상징하는 옥새였다. 원나라 말기 주원장(朱元璋)이 파견한 서달(徐達)의 대군이 대도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을 점령했다.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는 옥새를 끼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200년 후, 목동이 이상한 양을 발견했다. 3일간 한자리에 쭈그려 앉아 풀을 먹지 않았다. 땅을 파보니 옥새가 있었다. 훗날 이 보물은 차하르 칸의 수중에 들어갔다. 칸 사후 옥새를 보관하던 태후는 아들과 함께 귀순을 결심했다. 옥새를 황타이지에게 헌납했다. 황타이지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듬해(1636년) 4월, 선양(瀋陽)에서 황제 즉위식을 했다. 만주라는 족명을 처음 사용하고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바꿨다. 동시에 몽고 여인 5명을 황후와 황비로 책봉했다.”

당시 중국에는 명, 만주, 몽고 3대 정치세력이 있었다. 명나라의 강력한 상대는 만주였다. 몽고는 명과 만주의 쟁취 대상이었다. 만주와 몽고는 생활이나 습관, 언어, 종교 등이 같거나 비슷했다. 만·몽연맹이 수월했다. 황태극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도 몽고는 병력이 빈 만주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20세기 초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청의 세력이 약화되자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집적거렸다. 만주는 청 제국의 발상지였다. 베이징 입성 후 만주를 성역화했다. 만주족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한족의 이주를 금지시켰다. 비옥한 땅에 상주인구가 적다 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국력이 약해지자 단속이 느슨해졌다. 한족들이 만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200여 년간 놀고먹던 만주인들은 생활력이 약했다. 먹고살기 위해 목숨 걸고 이주한 한족들의 상대가 안 됐다.

베이징 입성을 앞둔 장쭤린(맨 앞). [사진 김명호]

장쭤린(張作霖·장작림)도 할아버지 때 허베이(河北)성 다청(大城)에서 굶어 죽기 싫어 만주로 이주한 이민의 후예였다. 성도 장씨가 아니었다.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구술을 소개한다. “우리 성은 원래 리(李)지 장(張)이 아니었다. 고조할아버지 때 장씨 집안 여자가 우리 집안에 시집와서 아들을 낳았다. 친정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머리를 썼다. 남편 들들 볶고 시아버지에게 이상한 수작도 걸었다. 결국 미친 여자라며 쫓겨났다. 정신 나간 여자 몸에서 나온 애라며 자식까지 들판에 버리자 냉큼 안고 친정으로 갔다. 이씨 집안은 여자라면 진절머리를 쳤다. 재취를 들이지 않았다. 결국 대가 끊겼다. 부친에게 장남인 나라도 원래의 성을 찾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맘대로 하라고 하더니 엉뚱한 말을 했다. 이미 지난 일 어쩔 수 없다. 성이 장가건 뭐건, 내 자식이면 그만이다. 중국엔 우리 할머니 같은 대단한 여인들이 많다. 그런 일 막으려면 부인이 많아야 한다고 했다.”

동삼성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은 혁명파를 제압한 장쭤린을 중용했다. 장쭤린은 지혜로웠다. 혁명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지만 한 번에 그쳤다. 뿌리째 뽑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새로 잠입한 혁명세력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혁명파들도 다른 성처럼 독립을 고집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 눈에 든 장쭤린 승승장구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도 장쭤린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자오얼쉰과 위안스카이의 조력으로 장쭤린은 승승장구했다. 1912년 청나라가 완전히 멸망했다.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위안스카이가 총통에 취임하자 자오얼쉰은 총독에서 물러났다. 칭다오(靑島)에 은거하며 만·몽연합으로 복벽(復辟)을 도모했다.

총통 위안스카이는 기용할 명망가들을 물색했다. 자오얼쉰에게도 요직을 권했지만 거절당했다. “나는 청나라의 신하였다. 칭다오를 수양산(首陽山)으로 알고 백이 숙제 흉내나 내겠다.” 국사관 관장직은 수락했다. 조건이 있었다. “나는 청조(淸朝)의 관리였다. 청나라를 위해 일하고, 밥을 먹었다. 청조의 역사를 내 손으로 편찬하게 해주기 바란다.”

자오얼쉰은 1927년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년간 청사고(淸史稿) 편찬에 매달렸다. 자오얼쉰은 기력이 왕성했다. 나이 70에 셋째 부인 사이에서 첫아들을 봤다. 아들이 크면 만주의 왕이나 다름없는 장쭤린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싶었다. 장쭤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절하는 답장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유가 분명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