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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시각각] 전직 대법관의 회한과 희망[출처: 중앙일보]

bindol 2020. 12. 17. 04:30

이상언 논설위원

 

지난 8일 저녁 진동하는 스마트폰의 창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떴습니다. 몇 마디 안부 인사가 오간 뒤에 그의 어조가 다소 비장해졌습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 녹음해도 좋습니다. 내 이름 그대로 밝히고 글로 옮겨도 좋습니다.”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 국회 법사위 통과와 10일로 예정된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위원회 소집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한 때였습니다. 전직 고위 법관인 그가 이 사태에 대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정상 국가에선 법원이 검찰 통제
정치권력이 검찰 개혁 본질 훼손
공수처 족쇄 채우기도 사법부 몫

“이 혼돈의 원죄는 사법부에 있습니다. 검찰 개혁의 본질은 수사권·공소권이 바르게 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검찰의 권한 남용을 막는 것은 사법부가 할 일입니다.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검찰에 대한 통제를 사법부가 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정치권력이 하고 있습니다. 법원이 제 역할을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40년 가까이 판사 생활을 한 제 책임도 큽니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주인은 김용담(73) 전 대법관입니다. 2003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중앙일보 기사에 ‘전통적인 법관이라는 평을 들으며 일찌감치 차기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꼽혀 온 인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대표적 모범 법관이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부산고법에서 맡았던 사건 하나를 기억에서 꺼냈습니다. 신분증 위조 사기범을 검찰이 사기로 한 차례 기소한 뒤 한참 지나 공문서 위조 혐의로 재차 기소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중 처벌을 막았는데 대법원 상고심에서 항소심 결과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김 전 대법관은 그러면서 검찰권 오·남용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몇 가지 노력한 게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법원행정처 차장 시절에 ‘관련 자료 일체’라는 형식으로 청구되는 압수수색 영장은 발부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법관 재임 때 피고인이 법정에서 동의하지 않는 피의자 신문조서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이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 다 검찰의 반발이 심했던 사안입니다. 그는 영장 발부와 증거 채택에 법원이 더욱 엄격해져야 검찰의 권한 남용을 차단할 수 있다고, 그게 진짜 검찰 개혁을 유도하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일주일 뒤에 그를 만났습니다. 괴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공수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법원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영장을 통제하고 재판에서 적법하지 않게 수집된 증거를 꼼꼼히 가려내면 일단 무리한 수사는 상당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선택적 수사’와 ‘사건 덮기’ 우려에 대해선 “검찰이 직무유기 등으로 기소하고 법원이 엄격히 판결하면 공수처가 함부로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꽤 안심이 됐습니다. 결국 괴물에 족쇄를 채우는 일은 사법부 몫이라는 게 이날 대화의 결론이었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건도 결국 법관 손에 맡겨지게 됐습니다. 법과 규정, 상식적 절차가 모두 무시된 징계 심의가 진행됐습니다. 법치의 위태로움을 목도 중인 국민은 또 한 번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법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나 그래도 마지막으로 의지할 데는 그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 전 대법관은 “나는 판사들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진보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법원의 흑역사를 추적한 책 『사법부』에서 독재의 암흑시대에도 빛나는 판결, 정의로운 판사가 많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 판결 덕분에 이 나라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이 땅의 법치주의와 헌법정신의 생명줄을 사법부가 쥐고 있습니다. 부디 원로 법조인의 회한 어린 희망이 헛된 기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상언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이상언의 시시각각] 전직 대법관의 회한과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