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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277] 이야기 들려주는 직업

bindol 2020. 12. 28. 04:22


[조용헌 살롱] [1277] 이야기 들려주는 직업

조용헌 교수

 

 

책이 귀하고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문맹률이 높았던 시대에는 사람이 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직업이 필요했다. 귀는 뚫려 있어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소설을 이야기로 풀어서 전해 주는 이야기꾼을 전기수(傳奇叟)라고 불렀다.

이들 이야기꾼은 서울의 청계천 다리, 인사동 입구, 배오개 같은 사람 왕래가 많은 데서 영업을 하였다. 사람들 몇십 명이 전기수 옆에 둘러앉아 구수한 입담에 취해 있다가 중간에 이야기가 끊기면 청중이 엽전을 전기수의 모자에 던져 넣었다. 돈을 받기 위해서 중요한 대목에서는 일부러 이야기를 중단했던 것이다.

서울에만 눌러앉아 영업을 하는 전기수도 있었지만 지방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는 전기수도 있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의 구도 과정도 전기수와 인연이 있다. 소태산이 16세 때 처가 동네인 전남 영광군 백수읍의 홍곡리에 갔던 적이 있다. 1906~1907년 무렵이다. 홍곡리에는 대조영의 후예들인 대씨(大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대씨들은 정월 보름 같은 명절에는 잔치의 일환으로 돈 주고 전기수를 동네로 불러서 이야기를 듣는 관습이 있었다. 주로 소설을 이야기해 줬다. ‘조웅전’ ‘임진록’ ‘박씨부인전’ 같은 소설이었다. 특히 ‘조웅전’이 소태산의 흥미를 끌었다. 주인공이 월경대사, 화산도사, 철관도사와 같은 도인들로부터 검술, 호풍환우, 축지법과 같은 초능력을 전수받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정월 보름 처가 동네에 갔다가 전기수가 이야기해주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이전까지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산신기도만 해 왔던 16세 소태산은 ‘나도 산신이 아니라 도사를 만나야 되겠구나’ 하는 결심을 굳힌다. 당시 전국구 도사는 불교계의 경허와 김제 금산사 근처의 구릿골 약방에 강증산이 있었다.

아무튼 전기수로부터 조웅전 이야기를 듣고 소태산의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보니까 설민석이 디지털 시대의 전기수 역할을 하고 있다. 타고난 ‘구라꾼’이다. 전생부터 이거 했던 것 같은 목소리와 눈빛이다. 전생부터 하지 않으면 프로페셔널이 되기 어렵다. 종이책 읽는 것보다 휴대폰의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게 훨씬 편한 시대와 딱 맞는 궁합이다. 문제는 정확도이다. 지식 대중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도 상대해야 하는 21세기 전기수는 전기 충격을 받으면서 내공을 쌓는 어려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