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가을의 꽃 국화는 보통 들판에서 저절로 꽃을 피우거나,
문사(文士)들의 마당이나 화분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어느 경우도 은은한 향기와 함께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지만,
고고한 기품의 또 다른 상징인 소나무와 함께 있으면,
그 매력이 배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사람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산 절벽에서 소나무 옆에
피어난 국화꽃을 만난다면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인후(麟厚)는 이런 환상적 풍광을 접한 행운아였다.
절벽의 소나무와 국화(散崖松菊)
北嶺層層碧(북령층층벽) 북녘 고개 층층이 푸른 빛 짙고
東籬點點黃(동리점점황) 동쪽 울타리는 황금색 점 찍듯
緣崖雜亂植(연애잡난식) 벼랑 타고 소나무와 국화 섞여 있는데
歲晩倚風霜(세만의풍상) 늦겨울 찬 서리를 잘도 버티네
철은 늦가을이다.
시인은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집 밖으로 나서 늦가을 풍광을 만끽하던 차였다.
이리저리 걷다가 산비탈 벼랑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북쪽으로는 언덕이 솟아 있었고,
동쪽으로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그런데 같은 늦가을 풍광이면서도 양쪽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북쪽 언덕은 누군가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여러 층으로 나뉘어 소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있었는데,
늦가을임에도 여전히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것으로만 보면 계절이 늦가을임을 종잡을 수 없지만,
그 동쪽으로 둘러쳐진 울타리를 보면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하였다.
가을의 꽃인 국화가 여기저기 점을 찍어 놓은 듯이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황색 국화는 소나무의 푸른빛과 대비되어 더 도드라져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벼랑을 보니, 소나무와 국화가 아무렇게나 뒤섞이어 있었다.
청색과 황색이 혼합되어 오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소나무와 국화는 그 빛깔만큼이나 다른 풍모를 지니고 있지만,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둘 다 지조나 절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늦가을 벼랑에서 찬바람을 꿋꿋이 견디어 내는 소나무와 국화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단풍의 화려함을 뒤로 물러나고,
낙엽의 스산함이 찾아드는 늦가을에 국화와 소나무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늦가을 날 벼랑에서 만난 소나무와 국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