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세 일기] 세월은 흘렀어도 우정은 남았다[아무튼, 주말]
어제 밤에는 꿈에 김태길 교수를 보았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얘기를 하다가 나에게도 손을 흔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깨고 나니까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일러스트= 김영석김 교수는 나보다 7개월 아래인데 언제나 내 선배 대접을 받곤 했다. 연장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한 번은 경북대학 강연회 연사로 같이 가게 되었다. 먼저 강연을 끝낸 김 교수에게 10분만 앉아 있다가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경상도 학생들이 예절바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오늘 다시 감탄했다. 이런 강연회에서는 동생이 먼저 하고 형님이 후에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감사하다”고 했다. 학생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김 교수는 두고 보자는 표정이었다. 저녁을 같이하면서, “한 번만 나보고 형님이라고 부르면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는 얘기를 안 할게…”라고 해 동석했던 사람들도 웃었다. 김 교수가 미국서 돌아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연세대로 모셔오고 싶어 찾아갔다. 몇 가지 실정을 얘기하면서 연대는 기독교대학이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가급적 크리스천을 교수로 모시기를 원하니까, 양해해 달라고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몇 주간 김 교수가 나와 함께 교회 예배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김 교수도 기독교와 먼 거리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김 교수도 나와 같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감사하겠다는 내심이었다. 김 교수는 법학에서 윤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분이기 때문에 철학도로서 휴머니즘 본분과 종교적 신앙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은사인 박종홍 교수는 철학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암으로 작고하기 얼마 전에 신앙으로 귀의하여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 장례 예배에서 김 교수가 제자들을 대표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다. 김 교수는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따님을 잃었다. 그 사실이 장안에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가장과 아버지로서 견딜 수 없는 비참에 빠졌다. 너무 슬픈 일이었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위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을까 싶었을 때, 전화를 걸었다. “많이 힘드시지요?”라는 내 목소리도 슬픔에 젖어 있었다. 김 교수는 “철학이나 윤리학은 이런 때 아무 의미도 없어졌습니다. 김 선생 같으면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라고 했다. 김 교수도 말년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우리 곁을 떠났다. 재작년 늦은 여름에 김 교수의 묘소를 찾아갔다. 조용한 산자락 노송들이 내려다보는 가정 묘지였다. 묘비 앞에 앉아서 사라져 가는 옛날 일들을 회상해 보았다.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 방문이겠기에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곧 석양이 될 것 같아 일어섰다. ’50년의 우정이었는데, 5년만 더 함께 일하다 가시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한민국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슬픔이었는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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