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605] 탄조모상 (呑棗模象)

bindol 2021. 1. 14. 04:19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심문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 중 권철신(權哲身)의 처남 남필용(南必容)의 공초(供招)는 이랬다. “제가 여러 해 동안 사학(邪學)을 독실히 믿은 마음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라에서 지극히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지라 감히 옛것을 고쳐 새로움을 도모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권철신은 제사를 갑작스레 폐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밥과 국만으로 대략 진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 말에 따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폐하지는 않겠습니다.”

국금(國禁)을 따르겠다면서도 신앙을 버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제사를 드리기는 하겠는데 흉내만 내겠다는 얘기였다. 이 진술에 대해 형조에서 내린 판결문은 이랬다. “이 죄수는 전후의 공사(供辭)가 모두 골동설화(汨董說話)요 탄조모상(呑棗模象)이라 입으로는 그렇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口然心否). 제사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해놓고 억지로 대략 지내겠다 하고, 사학이 좋다고 하고선 조정의 명령에 따라, 버려서 끊겠다고 말한다.”

표현이 재미있다. 골동설화는 골동품처럼 케케묵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란 뜻이다. 탄조모상은 대추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혀로 그 모양을 더듬는다는 얘기다. 대추는 가운데 씨가 있어 함부로 씹다가는 이빨을 다친다. 혀로 살살 굴려 과육 부분을 가늠해 조금씩 베어 물어야 해서 이런 말이 나왔다. 예각을 피해 우물쭈물 구렁이 담 넘어가는 소리만 한다는 뜻이다. 말로는 수긍하는 체하며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하면 죽음이 기다린다. 죽기는 싫고 배교를 선언할 마음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말로 호도(糊塗)해서 상황을 모면할 작정을 했다. 그 결과 그는 제사를 전폐하겠다는 놈보다는 조금 낫고, 이미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니 죽음을 감하여 강령(康翎) 땅으로 유배 보내라는 판결이 났다. 긴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니면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대추알 우물대는 탄조모상의 두루뭉수리 화법으로 목숨을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