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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치명적 불평등…운이 운명이 되지 않도록

bindol 2021. 1. 16. 04:39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

 

치명적 불평등(a virulent inequality).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코로나19 펜데믹이 시작될 무렵, 이 사태의 효과를 지적한 말이었다. 이는 코로나19가 불평등을 심화할 것이라는 온건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있던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말하자면 불평등이라는 잠복기 바이러스가 코로나19를 계기로 펜데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코로나19는 불평등 심화가 아닌
기존 불평등 펜데믹 계기로 작용
비교적 좋은 경제지표에 눈 가려
K-양극화 방치 않도록 전력해야

미국 언론들은 지난해 봄 코로나19 펜데믹과 흑인 폭동이 확산하면서 피케티를 인용해 ‘치명적 불평등’이 펜데믹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지적하는 기사들을 쏟아냈었다. 코로나19가 이미 미국 내부에서 곪고 있던 불평등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터뜨렸다는 것이다. 이는 흑인 폭동으로 시끄럽던 당시의 분석 키워드 중 하나였다. 미국의 여러 언론사가 코로나 펜데믹이 청년들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아주 심각한 양상을 보이는 지역들을 미국 지도를 통해 그래픽으로 보여주며, 결국 코로나19가 강타한 것은 저소득층 흑인과 같은 사회 약자층이 사는 지역이라고 보도했었다.

이제 코로나19 펜데믹 1년이 마무리되면서 통계로 볼 수 있는 경제 성적표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피케티의 경고는 국가별 경제지표로도 확인되기 시작했다.

최근 한국은행은 국제경제리뷰에서 ‘코로나 19 이후 유로 지역 내 경제력 격차 현황 및 시사점’을 분석했다. 이 자료에선 단일통화 유로를 사용하는 유럽 내에서도 코로나19로 지역별 경제력 차이가 확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의 국가별 경제성장률·실업률·국가부채 등 경제 상황은 남쪽의 열세와 북쪽의 선방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남·북 유럽 국가 간 성장률 표준편차는 2019년 0.5%p 수준에서 2020년에는 1.5%p 가량으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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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유럽은 북유럽보다 경제여건이 취약했지만, 유로 도입 이후에는 비슷한 성장 속도를 유지하면서 나름의 균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이런 노력을 무력화한 것이다. 산업 구조와 인터넷 업무 인프라 등 구조적 차이가 국가 간 격차를 만들어냈다. 특히 자영업 비중이 높은 이탈리아나 임시계약직 비중이 높은 스페인 등의 취약한 고용안정성은 국가경제의 취약성으로 곧바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 이제 우리나라 얘기를 해보자. 숫자로 본 우리 경제실적은 아주 좋다. 마이너스 성장이긴 해도 수치로는 OECD 회원국 중 1위가 될 전망이다. 세계적 호황이었던 정보통신과 바이오의 약진에다 주식·부동산 자산 가격 급등은 경제수치에 좋은 소식으로 작용했다. 한데 코로나19 시대의 우리 경제는 ‘K-성장’ 혹은 ‘K-양극화’ 양상이다. 고소득층 소득은 더 늘었고, 저소득층 소득은 더 줄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거시적 수치로는 우리의 문제가 잘 읽히지 않는다.

이젠 K에서 아래로 미끄럼 타는 쪽을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서비스업과 자영업자, 임시직 근로자들이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 25.4%(2018년 기준)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식업 영업점 수는 인구 80명당 1개꼴이다. 그런데 요즘 자영업 폐업은 트렌드다. 이미 외식업 핫플레이스도 폐업한 점포들로 을씨년스러워지고 있다. 조만간 ‘깨진 유리창 효과’를 도처에서 실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우리나라 국민의 다수라는 것이다.

원래 나는 숫자로 현상을 분석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요즘은 숫자를 버리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숫자에 눈이 가려지면 다수의 고통받는 국민은 ‘치명적 불평등’을 개인의 불운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치명적 불평등이 밖으로 터지는 게 아니라 안으로 곪아 골수로 전이된다면 우리 사회의 건강은 유지될까.

 


요즘 K-양극화는 단순히 소득의 양극화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한 예로 온라인 교육이 진행되면서 디지털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학생들의 불평등이 교육기회의 불평등, 교육결과의 차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거기에 요즘 부동산 강남 불패론이 여전히 강한 것도 학교마다 디지털 교육 인프라와 방식에 차이가 벌어지며 ‘역시 강남 학교’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청소년기 교육과 문화의 불평등을 방치해선 안 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인생의 불평등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생 초년기의 ‘운발’이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코로나19의 수혜 계층과 업종이 자발적으로 고통을 분담하는 ‘이익 공유제’를 제안했다. 민간의 연대와 협력으로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말씀은 아름답다. 한데 인간사회에 그런 게 가능했다면 ‘치명적 불평등’이라는 용어가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지금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이 상황을 ‘선한 말씀’으로 분식하며, 불평등과 그에 따른 원망마저도 외주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불평등 양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꼭 필요한 곳에 적절한 지원과 조처를 하는 정밀한 ‘미사일 요격식’ 해법을 투입할 때다. 두루뭉술한 착한 해법이 아닌 집요하고 효과있는 해법을 찾은 모습을 보고 싶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