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눈에 담긴 사연[이준식의 한시 한 수]〈94〉

bindol 2021. 1. 30. 07:19

江雪  /  柳宗元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


산이란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엔 사람자취 모두 끊겼구나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홀로 낚시하는데 찬 강에 눈이 내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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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산에 새들은 더 이상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에는 사람 자취 사라졌다
외로운 배 위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서 홀로 낚시질

千山鳥飛絶, 萬徑人종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눈 내리는 강(江雪)’ 유종원(柳宗元·773∼819)


눈을 다룬 시에는 저마다 사연이 눈처럼 소복하다.
눈 시를 읽을 때 유난히 살가운 느낌이 들거나 그 의미가
도드라지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제각각의 사연 때문일지 모른다.


“눈 밟으며 들판을 걸을 때는 아무렇게나 어지러이 가선 안 되지.
오늘 나의 이 발자국, 결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 했던
서산대사의 ‘답설가(踏雪歌)’에는 웅숭깊은 배려심이 배어 있다.
흩날리는 눈발에서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었던 김광균의
설야(雪夜)는 아릿아릿한 회한과 추억을 소환하는 애달픔이 넘쳐난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
오오, 눈부신 고립/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처럼 자못 도발적이면서 고혹적인 사연도 있다.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노인이 혼자 낚시질하는 강촌의 설경을 그린
이 시에는 어떤 사연이 담겼을까.
낚싯대를 드리운 정겨운 장면은 평화로운 강촌을 떠올리게 하지만
화폭 속 고즈넉한 분위기와 달리 시인의 처지는 암담하고 적막했다.
정치개혁에 참여했다 실패하여 장안에서 쫓겨나 먼 남쪽으로 좌천되었던 시인.

주류 사회로부터 배척된 그는 무려 10년 세월을 유배자처럼 보내야 했다.
새들의 날갯짓도 사람의 발자취도 다 사그라진 강촌은 바로 단절과 폐색으로
점철된 시인의 고적(孤寂)한 삶을 투영한 것이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