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석 사회에디터
서울 종로 4가 사거리에는 원기둥 모양의 높다란 구조물이 서 있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1996년에 만들어진 기념탑이다. 박승직 창업주는 보부상으로 전국을 떠돌며 모은 자본을 바탕으로 1896년 이 곳에서 포목점을 열었다. ‘백년기업’ 두산의 출발점이다.
두산이라는 이름은 1946년 박 창업주의 아들인 고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이 두산상회로 개명하면서 등장하게 된다. 선친이 박 전 회장 이름에서 말 두(斗)자를 따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쌓아 올려 산같이 커지라”는 뜻으로 지었다.
이후 두산은 무역업, 주류업, 건설업 등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내실 있고 탄탄한 중견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를 앞세운 중후장대형 기업으로 과감히 탈바꿈해 재계를 놀라게도 했다.
하지만 두산의 현재는 아름답지 않다. 해외 건설 붐의 퇴조와 탈원전 정책의 시행 등으로 급격히 흔들리면서 결국 채권단에 손을 벌리기에 이르렀다.
걱정스러운 건 경제 위기 초입일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 국민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대기업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했다. 한보, 삼미, 기아 등 대기업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지면서 연 7~8%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 -5.5%로 추락했다. 그해 2월 실업률은 8.8%, 청년실업률은 14.5%였다. 부모는 길바닥으로 내몰렸고, 자녀는 취업 길이 막혔다. 자살, 노숙, 가정 파괴 등 무시무시한 용어들이 일상적으로 통용됐다.
물론 당시의 ‘함량 미달’ 기업들과 현재의 두산을 비교하는 건 온당치 않다. 두산이 1조원을 수혈받아 한숨을 돌린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현 상황에서는 경제 위기가 본격화해 손 벌리는 기업들이 급증할 경우를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정부의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에 대한 뒷말이 많다. 어찌 보면 지난 20여년간 국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건 불규칙한 지원금이 아니라 고정적인 수입이며 이는 국가가 아닌 기업에서 나온다. 구휼도 좋지만 기업, 더 나아가 국민의 미래를 지킬 비상금까지 헐어내지는 않길 기원해본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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