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6] 그러다 초가삼간 태운다
cha-hyunjin 기자페이지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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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2.11 03:00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서민 금융 천국이었다.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 고려의 의창(義倉), 조선의 환곡(還穀)처럼 국가가 서민용 저리 융자에 앞장섰다. 가히 애민(愛民) 금융국이라 할 만하다.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대부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1515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간 이자를 받는 사업’을 처음으로 양성화했다. 그때 ‘약간’의 기준은 연 5%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이를 연 10%로 높였다. 영국은 채무자에게 가혹했다. 빚을 못 갚으면, 다른 식구들이 대신 갚을 때까지 채무자 전용 감옥에 가뒀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어렸을 때 구두닦이를 해서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빼낸 적이 있다. 그 경험에서 나온 것이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주인공 스크루지는 대부업자다.
우리나라도 한때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을 노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강력한 채무자 보호 장치가 작동했다. 이자 총액이 원금보다 많아지면 일정 기간 이자를 더 받지 못하도록 하거나(子母停息法) 금리를 0%로 인하했다(子母相侔法). 기독교의 안식년 개념이다.
하지만 채무자들이 크게 보호받지는 못했다. 통상 대출 금리가 연 50%에 이르러 살인적이었다. 채무자 보호 장치에 대응하여 대부업자들이 고금리로 자구책을 세운 것이다. 역대 왕들은 장리(長利) 즉, 지나친 고금리를 색출하여 곤장을 치는 시범을 보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대한제국은 법정 최고 금리를 연 40%로 낮추는 선에서 만족했다.
요즘 여당이 애민 금융국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노력 중이다. 재난이 닥쳤을 때 금융기관이 원금까지 탕감토록 하는 법률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놓쳤다. 채무자가 원금 탕감 권리를 갖는 순간, 대출 금리가 뛴다는 사실이다. 그 유구한 교훈을 20세기 들어 수식으로 표현한 것이 옵션 이론이다.
냉정한 돈의 세계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 부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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