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공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올 때 우리의 뇌는 공포라는 신호를 재빠르게 보낸다. 생각할 겨를 없이 무조건 도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차분하고 느긋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전광석화처럼 빠른 공포 감정이다. 만일 공포라는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야수를 보고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몰려오는 쓰나미를 보고도 상황을 파악하느라 대피하는 시간을 놓치고 말 것이다. 때로는 공포 시스템이 오작동되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기도 하지만, 솥뚜껑인 줄 알았다가 자라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에 공포는 생존의 최첨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생명줄 지켜온 ‘공포’
비이성적 공포 갖지 말라는건
전문가들의 상투적 표현일 뿐
비이성적·과도한 공포?
이런 공포 앞에 언제부터인가 ‘비이성적인’ ‘과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대개 이런 수식어들은 ‘합리적이지 못한’ ‘비상식적인’ ‘정도를 넘어선 사람이나 사태’를 가리킨다.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전문가들이 이런 수식어를 폄하의 용도로 사용하다 보니, 비전문가들은 비이성적으로 과도하게 공포를 느끼는 사람으로 꼼짝없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곰곰 생각해보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공포, 아니 감정은 본질이 비이성적이지 않은가. ‘비이성적 공포’라는 말은 ‘비공포적 이성’이라는 말처럼 당연한 게 아닌가.
공포는 홀대받아야 할 감정이 아니다. 공포는 인류를 지켜온 생명줄이다. 공포 영화에 대한 찬사를 제외하고 단 한 번이라도 예의를 갖추고 공포를 대접한 적이 있는가? 공포에 대한 언론과 전문가들의 ‘비이성적’이라는 악평이야말로 다분히 비이성적이다.
전문가 오류, 더 큰 공포 가져와
국내의 코로나19 상황이 아주 심각해지기 전인 2020년 2월 초, 국내 대표적인 전문가 집단들이 코로나에 대한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공포를 경계하는 의견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심지어 한 전문가는 인터뷰에서 코로나를 ‘독감 수준의 경미한 바이러스’라고 일축했다. 전 세계 확진자 1, 2위를 다투는 미국과 브라질의 상황이, 그들의 전·현직 대통령들의 “경미한 독감(little flu)” 발언과 무관하지 않음을 생각하면, 그 전문가의 발언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전문가들의 실패가 이들의 전매특허인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공포’라는 표현과 중첩된 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공포가 아닌가.
차갑고 냉철한 이성으로 위기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잘못된 초기 조언의 증거는 해외에도 널려 있다. 작년 2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에서 한 저명한 학자는 코로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과도하고 과장됐다고 말하면서 “정확하게 현실을 보자면 그런 과도한 대응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매우 용감하게 주장했다. 2020년 2월 28일자 블룸버그의 오피니언 기사에서 또 다른 전문가는 코로나에 대한 사람들의 과도한 불안은 “확률에 대한 무지(probability neglect)”에서 기인하는 과도한 공포라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전문가의 예측이 유발하는 공포가 더 큰지, 코로나가 유발하는 공포가 더 큰지 궁금할 정도다. 차라리 그때, 그들 역시 당황해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을.
전문가들의 견해가 대중을 불안하게 만드는 경우가 서평 분야에서는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 “다소 느슨하고 다소 물렁물렁하며 조금 지나칠 정도로 인위적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무시해도 좋을 소설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와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쏟아진 악평들이다. 서평이야 서평가의 마음이라지만, 이토록 엇나간 서평을 보는 건 공포스럽다.
공포에도 이유가 있다
공포 감정은 인류가 수많은 위험에 맞서 자신을 지켜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이제 공포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습관적으로 ‘비이성적’ ‘과도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대는 무례를 멈춰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험 앞에서 불안과 공포로 반응했던 우리를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공포의 소유자라고 폄하하던 전문가와 언론은 특히 그래야 한다. 훗날 자신이 내린 잘못된 평가로 인해 공포를 느낄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모를 때는, 증거가 확실치 않을 때는, 그리고 자기보다 더 나은 전문가가 있을 때는 (경험상 대개 그렇다) 침묵해줬으면 좋겠다. 공포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마음 읽기] 공포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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