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서도 빛난 할리우드 스타… “그녀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6] 와이파이·블루투스 원천기술 발명한 헤디 라마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1.03.16 03:00 | 수정 2021.03.16 03:00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구글은 2015년 헤디 라마(Hedy Lamarr·1914~2000)의 101번째 탄생일을 맞아 헌정 영상에서 이렇게 추모했다. 헤디 라마는 1930~1940년대 유명 여배우이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등의 원천 기술을 발명한 과학자였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유대인 배우 헤디 라마(1914~2000). 영화 '삼손과 델릴라'(1949)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둔 화려한 이미지의 여배우였지만, 동시에 과학과 발명에 천재적 소질을 보였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을 도울 방도를 고민하다 수중 무선 유도 어뢰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주파수 도약 기술을 개발했는데, 이 기술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퀄컴의 CDMA(부호분할 다중접속) 기술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휴대전화,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등의 원천 기술로 적용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헤디 라마는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유대인 은행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디의 부모는 어린 시절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피아노와 발레 등을 배우게 했다. 어린 헤디는 작은 무대를 만들어 혼자 동화를 연기하곤 했고, 기계의 작동 원리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인형이 춤추는 뮤직박스의 원리를 알기 위해 이를 분해한 후 다시 조립하기도 했다.
연기하기를 즐겼던 헤디는 16세에 영화계에 진출해 1933년 19세 때 체코슬로바키아 영화 ‘엑스타시’에 출연, 섹시한 장면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헤디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사색과 토론을 즐기는 성격이자 과학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배우가 된 뒤에도 외모보다 두뇌를 활용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그는 뛰어난 실용 발명가였다. 신호등 디자인 개선,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되는 알약 개발, 거동 불편한 사람이 욕조에서 쉽게 나올 수 있게 해주는 장치 등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발명에 몰두했다.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이 낸 주파수 도약 기술 특허 신청서.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에서 불행한 결혼 생활과 나치 치하의 유대인 박해에 시달리던 헤디는 영국으로 탈출했다. 거기서 미국 MGM 영화사 설립자 루이 메이어를 만나 다시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루이의 권유로 이름을 바꾸었다. 유대인 ‘헤드비히 키슬러’에서 미국 배우 ‘헤디 라마’가 되었다. 당시 영화 제작자이자 가장 빠른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던 하워드 휴스에게 사각형 날개 대신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유선형 날개로 바꾸라고 조언해준 사람이 헤디였다.
헤디는 1938년 영화 ‘알지어즈’의 히트로 유명 스타가 되어 히트작을 연속으로 쏟아냈다. 많은 영화를 찍다 보니 강행군하기 일쑤였다. 헤디는 가급적 유대인 신분을 감추려 했지만 유대인의 적인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키자 자신이 연합군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1940년 여름 피란민이 탄 영국 여객선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의 어뢰에 맞아 격침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70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293명이 사망했다. 독일 잠수함 유보트는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연합군을 이기게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헤디를 지배했다.
이런 시국에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돈을 번다는 게 불편했다. 연합군을 도울 방도를 고민하던 헤디는 혼자서라도 독일 잠수함 어뢰를 능가하는 성능의 어뢰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해 연구에 뛰어들었다. 헤디의 아이디어는 방해받지 않는 무선조종 어뢰였다. 헤디는 잠수함이 수중 무선 유도 어뢰를 발사할 때 적함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파수 혼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하나의 주파수로 신호를 전달하면 적이 그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할 위험이 있지만, 주파수를 여러 개로 분산시키면 적군이 이를 알아낼 수 없다는 점에 착안했다. 이렇게 되면 어뢰 명중률은 100%가 될 게 확실했다.
헤디는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 착안해 작곡가 조지 앤틸과 함께 함선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통신을 주고받는 ‘주파수 도약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이 혁신적인 이유는 설사 적군이 메시지의 일부를 도청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미 새로운 주파수를 통해 정보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42년 특허를 출원했다. 헤디는 특허가 나자 이 기술을 발명가협회를 통해 미 정부에 기증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이 기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품으로 만들 능력도 없어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그녀가 미국 시민이 아닌 외국인 신분이자 연합군의 적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허 자격마저 몰수했다. 해군에 제출된 특허는 일급 비밀로 봉해져 발명가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이를 쓰지 못하게 금지하여 전쟁 기간에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해군은 헤디에게 발명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미국을 돕고 싶다면 전쟁 채권을 팔라고 권했다. 헤디는 좌절하지 않고 전쟁 채권 판매 투어에 참여하여 채권도 잘 파는 한편, 야광 개 목걸이, 콩코드 항공기 설계 개선 등 발명 활동도 계속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디가 주연으로 출연한 ‘삼손과 델릴라’(1949년)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헤디는 44세 은퇴할 때까지 클라크 게이블, 로버트 테일러 등 유명 배우들과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빛 보지 못하던 그녀의 특허 기술은 1950년대 후반부터 재조명됐다. 1957년 펜실베이니아 전자공학 시스템국 기술자들이 라마의 특허 기술을 보안 시스템에 응용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때도 다시 응용됐다. 헤디 라마의 도청 방지 아이디어를 이용한 전화기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가 통화를 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전화 접속이었다. 헤디의 주파수 도약 기술과 이를 응용한 보안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 전송과 이동통신 연결망, 더 나아가 인공위성, 휴대폰, 무선인터넷이 탄생했다.
세실 B 드밀 감독의 1949년작 영화‘삼손과 델릴라’에 '삼손'역 빅터 마추어(왼쪽)와 함께 '델릴라'로 출연한 헤디 라마. /파라마운트픽처스
미군이 헤디의 주파수 도약 기술을 비밀 문서에서 해제하면서 누구나 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발명품은 전자 시대가 열리면서 통신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주파수 도약 기술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퀄컴의 CDMA(부호분할 다중접속) 기술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최초로 이 기술을 상용화했다. 주파수 도약 기술은 오늘날 휴대전화,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등에 원천 기술로 적용되고 있다. 해커로부터 컴퓨터를 보호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헤디 라마는 특허로 아무 금전적 이득도 얻지 못했다.
헤디는 은퇴 후 플로리다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발명을 뒤늦게 알아본 사람들이 온라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자 헤디의 업적은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1997년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은 CDMA 기본 원리를 발명한 공을 인정받아 미국 전자개척재단으로부터 ‘개척자 상’을 받았다. 헤디의 수상 소감은 단 한마디였다. “때가 왔군요.” 같은 해 말 헤디는 발명가를 위한 오스카상인 ‘BULBIE 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3년 후 2000년 헤디는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유언에 따라 유골은 아버지와 함께 걷던 빈 숲에 뿌려졌다. 2004년 독일은 헤디의 생일인 11월 9일을 공식적으로 ‘발명가의 날’로 선포했다. 에디슨처럼 잘 알려진 발명가들뿐 아니라 헤디 라마처럼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했던 이들을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2014년 헤디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름으로써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과 ‘발명가 명예의 전당’ 두 곳에 모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유대인 아빠의 밥상머리 교육과 베갯머리 이야기]
헤디 라머의 아버지는 은행 일로 바빴지만 틈만 나면 어린 딸을 데리고 숲속을 거닐면서 또는 도서관 난로 옆에 앉아서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줬다. 어린 헤디와 산책하면서 주변 물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작동 원리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인쇄기가 어떻게 작동해 글이 인쇄되는지, 가로등에 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자동차 엔진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차는 어떻게 길 위를 달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유대인 아빠들은 자녀가 어렸을 때 절대 외식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 자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또 자녀가 잠자리에 들면 베갯머리에서 15분 이상 책을 읽어준다. 이는 자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는 뜻도 있지만 자녀가 무엇에 호기심을 보이는지 알아내려는 의도도 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각자의 영혼에 걸맞은 달란트를 같이 주셨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녀가 자신의 ‘달란트’를 찾아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유대인 아빠들이 성인식(남자 13세, 여자 12세) 이전 자녀들에게 밥상머리 교육과 베갯머리 이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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