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소금 상권 장악한 유대인, 근대 첫 주식회사 설립… 자본주의 열었다

bindol 2021. 4. 28. 04:26

소금 상권 장악한 유대인, 근대 첫 주식회사 설립… 자본주의 열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7]
인류 문명과 소금史… 곳곳에 유대인 숨결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1.03.30 03:00 | 수정 2021.03.30 03:00

 

 

 

세계 4대 문명을 비롯해 모든 문명이 발전한 곳에는 예외 없이 소금이 있었다. 소금 덕분에 도시와 나라를 이룬 곳이 많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 활동을 하는 모든 동물은 다 소금을 필요로 한다. 야생 염소는 절벽에 붙어 있는 소금을 핥기 위해 수직 암벽을 기어오른다. 염소는 염분이 모자라면 이빨과 발톱이 약해져 먹이를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신체 활동 능력도 떨어져 천적들에게 잡아먹히기 쉽다. 목숨 걸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이유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이 물, 식량, 땔감, 소금이다. 보통 문명은 강 하류에서 탄생하는데, 그곳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4대 자원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됐다. 소금의 역사 곳곳에는 유대인의 자취가 서려 있다.

소금은 '불변의 약속'… '최후의 만찬'서 유다의 소금그릇 엎어져 '배신' 상징 - 구약성경은 신과 사람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룩한 인연을‘소금의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예수와 제자들의‘최후의 만찬’에서, 돈주머니를 움켜쥔 유다 앞에는 소금 그릇이 엎어져 있다(빨간 원 안). 유다가 곧 예수를 배신할 것임을 쏟아진 소금으로 상징한 것이다.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됐고, 소금의 역사 곳곳에는 유대인의 자취가 서려 있다.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베껴 선명하게 그린 작품. 원화는 색상이 바래 육안으로 구분하기가 어렵다. /위키피디아

가나안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 ‘예리코’ 탄생

사해는 죽음의 바다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에는 생명의 바다였다. 소금을 구할 수 있는 사해 인근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오아시스와 종려나무 덕분에 사해 위 예리코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그들은 요르단강과 샘물로 밀과 보리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계곡 길이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교통로이자 통상로로 그 요충지에 예리코가 있었다.

1952~58년 영국의 캐슬린 케니언 박사가 이끄는 발굴단이 예리코 샘 옆에서 돌을 쌓아 만든 제단과 뼈로 만든 용기를 발견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만200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수메르 도시보다 4000년 이상 앞선 도시 예리코 언덕 위에 4m 높이의 성벽 흔적이 있었다. 성벽은 마을이 생기고 대략 3000년 후인 9000년 전에 건설되었다고 발굴단이 판정을 내렸다. 성벽과 탑은 발전된 사회 조직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리코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다. 성 길이 300m, 너비 160m에 불과했다. 인구는 2000~3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문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던 시대에 도시가 발견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대단한 성과였다.

가나안 사람들, 소금으로 장거리 해상무역의 기원을 열다

가나안 사람들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소금이었다. 경제사를 추적해보면 문명 간 교역에도 소금이 숨어있다. 기원전 3000년경 가나안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열악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해야 했다. 그들 뒤에는 해발 300m의 거대한 레바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남은 길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사람의 최초 수출 품목들은 지역 특산물인 올리브유, 포도주, 건어와 소금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해 소금 이외에도 이집트 소금호수 밑바닥에 생긴 소금 덩어리 조염을 사와서 이를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소금을 만들어 지중해 지역에 내다 팔았다. 지중해 연안은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모래톱 해안이 대부분이어서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는 갯벌이 거의 없다. 또 북부 유럽은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아 소금 생산이 어려웠다. 그만큼 소금은 매우 귀했던지라 비싼 값에 팔렸고, 멀리 갈수록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장거리 교역의 기원이 되었다. 현대에도 천일염은 전체 소금 생산의 3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땅속에서 파내는 암염이다.

사해도 고대엔 '생명의 소금' 바다 -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라는 의미로 '사해(死海·Dead Sea)'로 불리지만, 고대에는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을 구할 수 있는 생명의 바다이기도 했다. 소금 결정으로 뒤덮인 사해의 암석 너머로 호수 물에 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일보 DB

소금이 청동기시대를 만개시키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스트라본에 의하면, 기원전 2000년경 가나안 사람들은 멀리 영국 남부 콘월까지 가서 소금을 주석과 바꾸어왔다. 이로써 유럽 대륙에 대량의 주석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청동기시대가 만개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장거리 해상교역을 위해 중간중간에 보급품을 조달받을 수 있는 식민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 식민 도시들이 후에 주요 도시국가들로 크게 된다. 그중 하나가 로마를 위협했던 카르타고였다.

가나안에는 소금을 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래가 활발하고 시장이 발달한 곳에는 경제가 빨리 발전하기 마련이다. 당시는 암염 광산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라 소금 생산이 가능한 곳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참고로 그리스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자주색 옷을 입고 다닌다 하여 그들을 ‘페니키아’, 곧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다윗 왕의 소금 계곡 쟁탈 전쟁

다윗 왕 시대의 히브리 왕국은 지금 이스라엘 영토의 다섯 배일 정도로 크고 막강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소금 교역이었다. 유대 광야를 통과해 사해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연결된 도로 중 룻기에서 읽을 수 있는 ‘소금길’이 있었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다윗 왕이 남쪽 에돔 왕국을 복속시킨 것은 군사적인 면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큰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에 보면, 다윗 왕이 사해 밑의 염곡(소금 계곡)을 차지하기 위해 에돔 왕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염곡 전투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이 죽었고, 전투 후에도 다윗 왕은 에돔에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소금은 목숨 바쳐 싸우고 지켜야 할 중요 자원이었다.

 

'인류 첫 도시' 예리코 유적 -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예리코 유적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사해와 인접한 예리코에는 일찍부터 고대인들이 정착해 요르단강과 샘물로 밀과 보리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예리코는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DYKT Mohigan/위키피디아

베네치아 유대 상인의 동방무역

중세 베네치아가 동방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힘도 소금에서 나왔다. 베네치아는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피란민들에 의해 탄생한 도시이다. 피란민들이 늘어나자 늪지에 인공섬들을 만들어 오늘날의 베네치아가 되었다. 8세기에 해수면이 1m 낮아져 9세기부터 갯벌에서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 귀한 소금을 동방으로 가져가 비단과 향신료 등 진귀한 상품들과 바꾸어 왔다. 염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소금의 독점권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 확보를 위해 1250년부터 120년 동안 4차례나 전쟁을 했다. 십자군 전쟁 때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했다. 당시 동방무역을 위해 이슬람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기독교 상인이 아닌 유대 상인들이었다.

소금 상권 장악한 유대인, 근대 첫 주식회사 설립

1492년은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이해에 신대륙이 발견되고, 이슬람이 유럽 대륙에서 쫓겨났으며, 스페인 왕국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있었다. 이때 추방당한 유대인 37만 명 중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 저지대로 올라갔다. 그들이 척박한 땅에서 주목한 것은 절임 청어였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독일 북부의 한자동맹 상인들이 공급하는 암염으로 절임 청어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값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들여와 암염을 퇴출시켰다. 이후 유대인들은 소금 상권을 장악한 여세를 몰아 절임 청어 산업도 주도하게 된다.

그 뒤 청어 수요가 늘어나자 유대인들은 어선을 건조하면서 화물선도 함께 만들었다. 당시 화물선의 통행세는 갑판 넓이에 비례해 받았다. 유대인들은 통행세를 적게 물기 위해 갑판 넓이를 줄이고 화물 싣는 선복을 늘린 배불뚝이 플류트선을 개발했다. 이 배는 비교적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유선형 배에 비해 건조비가 적게 들었다. 그리고 돛대에 처음으로 복합 도르래를 설치해 선원 수를 3분의 1로 줄일 수 있었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화물 운송료를 낮추어 플류트선들이 유럽 화물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이후 암스테르담은 물류 기지가 되어 중계무역이 크게 발전했다.

무역이 발달하니 이를 지원하는 금융과 보험이 발전했다. 유대인 주도로 1602년 근대적 의미의 첫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탄생했다. 이후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주식거래소’가 설립되었다. 각 나라에서 모여든 1000여 개의 주화들을 길더화 지폐로 통일시킨 ‘암스테르담 은행’이 이때 만들어졌다. 소금이 탄생시킨 자본주의의 씨앗들이다.

[소금은 신뢰의 상징, 최후의 만찬 유다의 소금 그릇은 왜 엎어져 있나]

고대 유럽에선 귀한 손님이 오면 소금으로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 앞에 소금 그릇을 놓아 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서 배신자 유다는 돈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다. 그 앞에 놓인 소금 그릇은 엎어져 있다. 유다가 예수와의 약속을 어기고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엎어져 있는 소금 그릇으로 상징한 것이다. 소금은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불변의 약속을 상징하여 세례 때 소금을 썼던 때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민수기’에는 신과 사람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룩한 인연을 ‘소금의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인류가 지금처럼 자유롭게 소금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고려 충렬왕 14년(1288)에 소금 전매 제도가 시행된 이래, 전매 제도에서 풀린 게 1961년이니 소금이 자유롭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60년 남짓이다. 기원전 7세기 시작되었던 중국의 소금 전매제가 풀린 것은 2014년이고 소금 가격이 자율화된 것은 2016년이었다. 소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상품이었다. 모든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발아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사에서 빛을 보았던 도시나 국가들이 소금에 힘입어 번성한 곳이 많았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