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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아버지의 가로등

bindol 2021. 4. 30. 03:57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아버지의 가로등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입력 2021.04.29 03:00 | 수정 2021.04.29 03:00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으로 핸드폰을 받았다. 한동안 열어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한동안 떨어져 살았기에 평소의 아버지를 만나기가 두려웠다.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기에 통화 내역에 찍힌 내 이름을 마주하기가 무서웠다. 아버지의 폰을 상자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방에 들어올 때마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상자를 더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다.

/일러스트=이철원

일 년이 흘렀을까, 술기운을 빌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사진첩에 들어갔다. 사람을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이 가로등 사진이었다. 저녁 노을이 지는 순간의 가로등, 한밤중에 빛나는 가로등, 어스름한 골목의 가로등. 수많은 가로등 사진이 담겨있었다. 한참 동안 가로등 사진을 바라보다가 체한 것처럼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왜 가로등 사진을 찍었는지. 그날 이후 울음은 아주 오랫동안 찾아왔다.

일 년이 더 흘렀을까. 어두운 저녁에 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불 켜진 가로등 위에 달이 떠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몰려왔다. 가로등과 달을 나란히 찍었다. 그 순간 불쑥, 아버지의 가로등 사진이 떠올랐다. 집에 가서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 내가 찍은 사진과 구도가 같았다. 내 안에 아버지가 다녀간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울음이 멈췄다.

나는 이제 아버지와 똑같이 가로등 사진을 찍는다. 가로등 속에 숨겨놓은 아버지의 말을 찾고 싶어서. 나에게 가로등을 찍는 일은 아버지의 언어를 발음하는 일이다. 가로등을 찍으면 찍을수록,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언어가 천천히 되살아났다. 아버지는 아들과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할 때마다 헛기침을 했다. 헛기침은 어색한 아들에게 말을 걸어보려는 아버지의 언어였다. 아버지는 설렁탕을 함께 먹을 때마다 깍두기 한 움큼씩을 국물에 넣어주었다. 깍두기는 탕이 뜨거워 아들이 입을 델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언어였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내 방에 음악을 틀어놓고 나서야 씻으러 가셨다. 음악은 학교 가는 아들을 좋은 기분으로 깨우려는 아버지의 언어였다. 아버지는 늘 말이 없었지만, 사실은 늘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늘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아버지의 바둑책을 들여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같은 화제로 얘길 나누고 싶었다. 나는 집에 들를 때마다 늘 간장에 마가린을 넣고 밥을 비벼 먹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비벼주었던 간장밥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다 하룻밤을 자고 가는 날에는, 방에서 늘 조관우의 음악을 틀었다. 학교 가는 아들을 위해 틀어주었던 아버지의 음악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늘 서로에게 말을 걸었지만, 늘 서로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마 모든 사람에게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가 있을 것이다.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고, 괴로워서 웃음 짓는 사람이 있다. 행복한데 왜 우냐고, 괴로운데 왜 웃느냐고 묻는 순간, 우리는 다른 언어로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거리는 조금 더 멀어질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남긴 가로등의 언어를 아직 모른다. 하지만 종종 가로등을 찍으며 아버지의 언어를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언어를 모두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웃을 때 함께 웃고 울 때 함께 울면서 그들의 언어를 발음해본다. 말없이 침묵에 잠긴 친구를 보며 침묵의 언어를 발음해본다. 말없이 거친 숨을 쉬고 있는 후배를 보며 호흡의 언어를 발음해본다. 말없이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선배를 보며 손짓의 언어를 발음해본다. 아직은 발음에 그칠 뿐, 서로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언어를 수없이 발음하며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덜 외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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