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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능력주의의 덫[출처: 중앙일보]

bindol 2021. 6. 24. 04:17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21일 국민의힘 여성정치아카데미 입학식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면 여성이나 젊은 세대가 전혀 불리함 없이 경쟁할 수 있다”며 청년·여성 할당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는 공직 후보자 자격시험으로 선출직 공직자를 뽑자는 주장도 이어갔다. 그는 저서 『공정한 사회』(2019년)에서 군 가산점제를 부활하고 여성에 군 복무 기회를 주자고 했다.
 

여성·비정규직은 불평등 시달려
능력주의는 차별 더 심화시켜
불평등 악순환 끊는 게 시대정신

이 대표의 능력주의(meritocracy)에 젊은 남성들은 열광한다. 그가 국민의힘 대표로 선출된 데도 이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젊은 남성 상당수는 여성보다 특혜를 받은 것도 없는데 여성을 우대하는 제도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대표의 능력주의가 한국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인지 여부다. 한국 사회에서 국회를 제외하고 여성 할당제가 제 역할을 하는 영역은 거의 없다. 청년들은 할당제가 없으면 나이든 세대에 가로막혀 정당이나 정부 진출이 불가능하다. 이 대표의 정계 입문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사회는 차별이 극심하다.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졸과 고졸 이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법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규정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근로자는 정규직 임금의 70% 수준을 받는다. 여성 근로자나 고졸자의 평균 임금도 남성 근로자나 대졸자의 70% 안팎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그보다 더 커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은 대기업의 60%를 밑돈다. 이런 차별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정부는 손 놓은 채 개인의 능력으로 차별을 극복하라는 주문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이런 불평등이 생기는 원인은 개인의 능력 차이도 있지만 사회가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며 강화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시험 성적을 공정의 잣대로 여긴다.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출발선은 서로 다르다. 부유층 자녀는 사교육과 부모 지원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앞서 출발한다. 이를 무시한 채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서소문 포럼 6/24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법대 교수는 『엘리트 세습』에서 능력주의 사회가 중산층을 해체하고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지적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를 투자해 자녀들에게 엄청난 사교육을 시키고 좋은 대학을 보내 유능한 엘리트로 육성한다. 반면 중산층 이하 사람들은 자녀 교육에 막대한 돈을 투자할 여력이 없다. 그 결과 부유층 자녀는 더 부유해지고 중산층 이하 자녀는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데는 엘리트들의 승자독식 사회에 좌절한 백인 저소득층이 힐러리 클린턴으로 대변되는 엘리트들에게 좌절했기 때문이라고 마코비츠 교수는 분석한다.
 
우리 사회도 능력 세습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지난해 1학기 대졸 신입생 가정의 소득을 분석한 결과 상위 20%에 속하는 부유층인 9·10분위 출신이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일명 스카이) 신입생의 55.1%를 차지했다. 이는 2017년 41.1%에서 3년 만에 14%포인트나 높아진 것이다. 좋은 대학 졸업 여부는 사회 진출 후에 받는 임금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상위 20%에 속하는 대학의 졸업자는 평균 연봉으로 3766만원을 받는다. 이는 하위 20%에 속하는 대학의 졸업자(2912만원)보다 854만원 더 많이 버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얼핏 보면 공정한 것 같지만, 실제론 불공정을 심화하고 사회를 양극화한다. 2019년 9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자녀 입시 비리 문제로 시끄러울 때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의 가치는 교육에서도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며 수능 비중 확대를 주문했다. 수능이라는 단일 시험으로 평가하는 게 공정하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그러나 수능 비중 확대는 지방 고교생에게 불리하고 사교육을 많이 받는 강남 고교생에게 유리해 불평등을 깊게 했다.
 
능력주의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조국 사태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서 편법과 반칙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이에 불만을 갖고 좌절하고 분노한 젊은 남성들은 “이럴 바에야 최소한 결과의 공정성은 보장되는 시험 성적으로 결정하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킨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극복하는 게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Zeitgeist)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능력주의의 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