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 [10]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上]
‘수출 규제’로 뒤바뀐 제국의 운명
달러 발행은 왜 국채와 연동되었을까? 그 연원을 살펴보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금은 긴 여행이다. 1913년에 설립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영국의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했다. 그렇다면 영란은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17세기에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통째로 영국으로 옮겨온 과정과 영란은행 설립 배경을 알아야 한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을 건넌 가장 큰 이유는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영국이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일이다. 어떻게 후진국 영국이 당시 최강국 스페인을 상대로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번 칼럼에서 살펴보자.
수출 규제가 역사를 바꾸다
수출 규제가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19년 7월 1일 일본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기로 발표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일대 타격을 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덕분에 우리 반도체 소재 산업이 대일 종속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됐을 뿐 아니라 소재 부품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 왕 카를 5세
과거에도 수출 규제로 제국의 운명이 뒤바뀐 사례가 있었다. 16세기 영국과 스페인 제국 이야기이다. 영국 왕 헨리 8세 때 일로, 그 무렵 영국은 유럽 대륙에 비해 형편없는 후진국이었다. 국가의 주 수입원은 양털 판매와 해적질이 전부다시피 했다. 그나마 양털 수출도 유대 상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해적질에 필요한 대포도 모두 대륙에서 수입해 쓰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수입 대포를 주로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에 썼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유대인 경제권인 플랑드르 공업지대의 영국 수출 금지를 단행해 영국은 더 이상 청동 대포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 자급자족 정책, 철 대포를 개발하다
그러자 영국 왕 헨리 8세는 자급자족 정책을 서둘러 대포 자체 제작에 나섰다. 당시 청동 가격은 철의 4배에 달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는 철 대포 개발에 나섰다. 왕은 먼저 철광맥이 있는 서식스숲의 제철업자들에게 거액을 지원해 품질 좋은 철을 생산케 했다. 그 결과 1540년대 서식스 지역의 제철 공장은 50곳이 넘어 균질한 철 생산에 성공했다. 이는 훗날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다.
당시 영국은 효율적인 해적질을 위해서는 사거리가 긴 함포가 절실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륙의 청동 대포보다 포신이 긴 장거리 철 대포 개발이었다. 왕은 장인들을 끌어모아 마침내 장거리용 철 대포 개발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운도 따랐다. 서식스 지역 철광석에 포함된 인(燐)이 대포의 내구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철 대포 생산 원가는 청동 대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후 영국은 연간 400톤이 넘는 철 대포를 생산했다. 이는 유럽 전체 대포 생산량의 70%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갤리언선의 포문과 평저선이 역사를 바꾸다
그런데 어렵게 개발한 장거리 함포의 명중률이 형편없어 문제였다. 함포 발사 때 배가 너무 흔들려 조준 사격이 소용없었다. 이를 극복한 게 평저선 개발이었다. 이는 영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함포 발사 시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선박의 밑바닥을 비교적 크고 편평하게 만들라는 아이디어는 당시 헨리 8세가 직접 냈다고 한다.
영국 왕 헨리 8세
헨리 8세의 공은 또 있었다. 그는 철 대포 개발 이전에 이미 상선을 차용한 무장 상선이 아닌 본격적으로 전투를 위해 설계된 전함을 제작해 ‘포문’을 설치했다. 그 전에는 갑판에 함포를 적재함으로써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전복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함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 헨리 8세는 그러한 문제를 ‘포문’을 만들어 해결했다. 수면 바로 위에 위치한 아래 갑판에 경첩식 나무 창문을 만들어 이 포문을 통해 함포를 발사하도록 했다. 후발국 영국이 이후 당대 최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중을 낮춘 갤리언선과 평저선에 장거리 철 대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갤리언선 포문 설치와 평저선 개발은 이후 세계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을 탄생시키는 시발점이 될 줄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세계사를 바꾼 칼레 해전
그 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휘한 1588년 칼레 해상 전투 때 영국은 갤리언 전투선 34척, 상선을 무장 시킨 163척 이외에도 평저선 30척으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와 맞섰다. 그 무렵 해전은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근접 전투였다. 보통 배와 배끼리 강하게 들이받은 후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상대 배에 내려 보병들이 건너가 싸우는 백병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영국 함대의 해군 선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반면 스페인 무적함대는 해상 백병전을 위해 해군 선원 8500명, 보병 2만명을 태운 엄청난 군사력으로 무장해 있었다. 무적함대 선박은 한 배에 보병만 350명씩 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칼레 항구에서 스페인 육군 3만명을 더 태워 영국 본토에 상륙시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상 백병전에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무적함대는 속도와 회전력의 우위를 활용해 사거리 길고 명중률 높은 철 대포로 공격해오는 영국 해군 갤리언 전투선과 평저선 함대의 원거리 함포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교황과 스페인 왕실 깃발을 단 맨 앞 가운데 함선은 무적함대 기함 ‘산 마르틴’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배는 영국 해군의 기함 ‘아크 로열’이며, 왼쪽은 전설적 해적이자 탐험가, 해군 제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의 부사령관 기함 ‘리벤지’인 것으로 보인다. 뒤편으로는 공격당한 스페인 함선들이 침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자 미상의 16세기 영국 유화. 영국 해군과 스페인 무적함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해전 ‘그레벨링엔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 그리니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영국의 갤리언 전투선은 무게중심이 낮고 길고 날렵해 철 대포가 200문 이상 있음에도 무적함대 배보다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게다가 무게중심이 낮아 안정되다 보니 대포의 명중률도 스페인 함대보다 높았다. 영국의 평저선 역시 함포 명중률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첨저선보다 월등히 높았다. 더구나 평저선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정박이 가능하여 인근 해안에서 보급품 나르기도 수월해 영국 함선들에 탄약과 식량 등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특히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는데, 이런 조건에서 평저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당시 영국 철 대포의 사거리는 평균 100미터였고, 스페인 무적함대 청동 대포의 사거리는 보통 60미터 내외였다. 영국 함선들은 근접 전투를 하지 않고 장거리 함포 덕분에 80미터 밖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롭혔다. 게다가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방향을 바꾸는 회전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영국 평저선은 단지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해 돛들을 재빨리 돌려 배를 회전시키면서 초승달 대형을 이루어 쳐들어오는 적선들을 향해 함포 공격을 자유자재로 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회전력이었다. 이로 인해 무적함대는 그들이 원하는 해상 백병전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쫓고 쫓기는 일주일간의 전투 끝에 지친 무적함대가 밤에 항구로 들어가 모두 정박해 있을 때 영국은 8척의 화공선을 기습적으로 상대방 진영으로 투입해서 폭발시키는 화공 작전을 폈다. 이에 놀란 무적함대 선박들이 밧줄을 끊고 달아나면서 아수라장이 됐을 때 함포 사격 총공세를 펼쳐 칼레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로 이어져
마침내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것이다. 이는 세계 권력의 이동이자 해상권 장악을 뜻했다. 그간 스페인 제국의 기세에 눌려 살았던 영국이 이를 계기로 중상주의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그들 영해에서만 스페인 배를 몰아낸 게 아니라 미국과 인도 항구에서도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쫓아내 버렸다. 이로써 이들은 북미에 식민지를 많이 건설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사의 분수령이었다. 스페인 제국이 지고 영국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항해조례를 통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 탄생 그리고 훗날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준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스페인 무적함대 꺾은 평저선]
밑바닥 편평해 회전 좋고 반동 줄여 함포 명중 높여… 임진왜란 때도 위력 발휘
우리나라 배는 고대부터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다. 중국, 일본 배들은 물살을 쉽게 가르기 위해 배 아래가 뾰족한 역삼각형인 첨저선이다. 유선형이기 때문에 평저선에 비해 속도가 빨라 다른 나라의 배는 첨저선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저선 같은 독특한 배가 탄생한 이유는 갯벌이 많다는 점이다. 배 밑이 역삼각형인 V자형 첨저선은 썰물이 나가면 갯벌에 쓰러진다. 그래서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고려 때 최무선 장군은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먼저 제조 방법이 유실되었던 화약 제조 기술을 복원했다. 그리고 대포를 만들어 평저선 위에 설치했다. 이로써 1380년 금강 하구 진포에 상륙한 왜선 500척을 섬멸하여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칼레 해전에 비해 200년 이상 앞선 이 진포 대첩이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다. 그 뒤 왜구들도 대포를 만들어 배 위에 장착했지만 우리 한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구의 배는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평저선은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평저선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일등 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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