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2]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下]
1913년 제이피 모건이 주도해 만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영국의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해 설립되었다. 그렇다면 영란은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몇 차례 공황과 금융 위기를 겪으며, 서방 강대국 중 중앙은행이 없는 유일한 나라였던 미국에서도 중앙은행 설립 필요성이 대두됐다. 1913년 12월 23일, 우드로 윌슨(가운데 책상에 앉은 사람) 대통령이‘연방준비법(The Federal Reserve Act )’에 서명했다.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한 민간 은행 연합체 형태인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시작이었다. 윌버 커츠의 그림 ‘연방준비법 서명'. /우드로 윌슨 대통령 도서관
윌리엄 3세, 유대 금융인들에게 전쟁 비용 긴급 협조를 요청하다
1688년 네덜란드에서 건너 온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 계승 이후 처음 부닥친 난제가 재정 적자 문제였다. 심각했다. 영국은 50여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다 보니 국고가 바닥나 있었다. 세금을 올렸지만 전쟁 비용 조달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비가 모자라자 1692년에 네덜란드 방식의 국채 발행 제도를 도입했다. 일종의 재정 혁명이었다. 그간 군주에게 빌려주던 대부 방식을 국채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국채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재정 악화를 견제하는 효과와 더불어 의회의 보증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국채 발행조차도 한계에 부딪혔다. 시중에 국채를 소화할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국채 발행이 힘들게 되자 더 이상 재정 충당 방법이 없었다. 왕으로서 가장 화급한 문제는 당장 눈앞에 닥친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 마련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인구가 4배나 많았고 모든 산업에서 앞서 있을 뿐 아니라 군사력도 영국보다 훨씬 강했다. 특히 영국은 비치 해드 해전에서 프랑스에 대패한 뒤 강력한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터라 수십 척의 전함 건조 비용이 시급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유대 금융가들에게 긴급 협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왕이 요청한 돈은 너무 큰 금액인 120만 파운드였다. 이는 어느 몇 명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큰돈을 마련하여 왕에게 빌려준다 해도 재정 적자가 날로 심해지는 형국에 돈 받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유대 금융인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들은 궁리 끝에 영국 내 반유대 감정을 고려해 우선 윌리엄 패터슨 등 스코틀랜드 금융인들을 끌어들여 앞에 내세웠다.
워싱턴 DC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건물. 미국은 1913년 영국 영란은행 시스템을 모방해 연준을 설립했다. /위키피디아
유대 자본, ‘전쟁기금 모금기구’를 주식회사 영란은행으로 전환
이때 유대인들은 또 한번의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전쟁기금 모금기구’를 만들어 돈을 모아 국왕께 빌려드리는 대신 모금기구가 왕실 부채증서를 담보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금괴를 출자하고 그만큼의 은행권을 발행해 쓰는 것이어서 밑질 게 없는 장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모금기구를 영란은행으로 전환해 최초로 은행권을 찍어 낼 수 있는 발권력을 쥐게 된다는 점이었다. 유대 상인들의 제안은 왕에게도 솔깃했다. 왕은 120만 파운드를 연이자 8%로 빌리는 대신 이자만 지급하고 원금은 영구히 갚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었다. 그 무렵 시중금리가 연 14%였던 상황에서 8% 금리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주식 공모로 탄생한 ‘민간’ 중앙은행
그리하여 영국 중앙은행은 주식 공모를 통해 설립 자금을 모집했다. 당시 영국 왕이 요구한 120만 파운드가 필요했으나 런던 상인 1286명에게서 주식 공모 형태로 거둬들인 돈은 8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공모된 금액이 목표액에 많이 부족했음에도 다급한 영국 정부와 의회는 1694년 7월 의회 입법을 통해 영란은행(BOE; Bank of England)의 창립을 허가했다. 영란은행은 주주들 가운데 2000파운드 이상 응모한 상인 14명에게 이사 자격을 주었다. 영란은행은 국채를 받고 정부에 8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는데, 일부는 은행권 형태로 지불되었고 그만큼의 금괴는 은행에 남아 지불보증금으로 보관되었다. 정부는 이 은행권으로 프랑스와 싸우기 위한 전함을 건조했다. 이것이 영란은행 지폐의 원조였다. 덕분에 프랑스는 전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은 쉽게 전비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유대 금융 권력이 주도하여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이 했던 금융 방식을 토대로 영국의 금융 혁명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먼저 의회가 ‘국가 채무에 대한 의회의 지불 보장’을 법으로 제정토록 하여 이를 근거로 1694년 경제특구인 ‘시티 오브 런던’에 영란은행을 설립했다. 이 민간은행이 정부로부터 특허은행 칙허를 받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은행권에 대한 독점 발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윌리엄 3세의 칙허에 의해, 금 세공인들은 금을 보관하고 보관 영수증을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갖고 있던 금조차 모두 영란은행 금고에 보관해야 했다. 윌리엄 왕은 유대인들에게 화폐 주조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환경까지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과 유대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탄생한 것이 영국의 ‘민간 소유’ 중앙은행이다. 그것은 동시에 현재에 이르는 국제 금융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설립 멤버 패터슨 쫓겨나다
참고로 은행이 설립되고 1년 뒤 은행 창립의 주역이었던 스코틀랜드 금융인 윌리엄 패터슨은 영란은행 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부분의 유대 주주들은 익명을 원했다. 그들은 고대로부터 박해와 학살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유대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패터슨은 많은 영란은행 주주들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주들과 일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이사들 간의 정책 대립에서 밀려났다. 영란은행 설립 초기에 간판스타로 쓰였던 패터슨이 결국 유대 금융인들에 의해 ‘팽’ 당한 것이다.
화폐의 발행과 국채를 묶어놓은 구조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의 재정 적자는 수직 상승했다. 쉽게 돈을 빌릴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 화폐의 발행과 국채를 영구적으로 묶어놓는 구조였다. 그래서 국채를 발행하면 화폐가 늘어나는 구조가 되었다. 그렇다고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고 이자도 갚아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혈세로 부담해야 했다. 이때부터 통화량 증대는 정부가 경제 상황을 감안하여 그 증감 정도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로부터 기인하는 이상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자율 2%대로 떨어져,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다
이렇게 영국의 금융 혁명은 윌리엄 3세를 따라 온 유대 금융인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정부 채권을 인수해 중앙은행의 기본 틀을 잡았다. 1751년 영란은행은 아예 정부 부채의 관리를 떠맡았다. 이때 유대인들은 또 한번의 기발한 금융 상품을 선보였다. 여러 종목의 국채를 상환 기간을 없앤 일종의 영구채 형태로 통합한 만기가 아예 없는 영구 공채를 발행했다. 이후 약 200년에 걸쳐 영국이 발행했던 콘솔채(consols)가 바로 그것이다. 정부가 상환 의무를 지지 않는 대신 매년 이자를 영원히 지급하는 조건으로 발행한 공채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의 투자자들이 콘솔채를 사들이자 국·공채 가격은 폭등했다. 표면 금리가 정해진 국·공채 가격이 올라간다는 것은 국·공채의 실질 금리가 떨어짐을 뜻했다. 국·공채의 시중금리는 1755년 2.74%까지 떨어졌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대단한 저금리였다. 이러한 저금리의 지속이 거대한 자본이 필요했던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방준비제도]
1694년 영국 수도 런던의 경제특구‘시티오브런던’에서 진행된 영란은행 설립 승인 모습. 유대금융인들은 오랜 전쟁으로 전쟁 자금이 필요했던 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왕실 부채증서를 담보로 은행권 발권 권한을 받았다. 조지 하코트 작, ‘런던 로열 익스체인지에서 영란은행의 설립’.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 근대 산업사와 금융사를 살펴보면, 영국 자본이 많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미국 근대산업사의 주역은 단연 제이피 모건이었다. 제이피 모건은 런던의 로스차일드와 합작으로 노던증권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의 철도산업과 철강산업은 물론 금융산업을 주도했다. 아울러 미국에 불어닥쳤던 몇 차례의 공황과 금융 위기 시에 방패막이가 되어 중앙은행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하지만 개인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로써 20세기 들어 미국에도 금융 위기 시 이를 막아줄 영국의 영란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1913년 미국이 중앙은행을 설립할 때 그들은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영국의 영란은행을 본떠 만들어진 민간은행연합체인 이유이다. 연준은 지금도 매년 수익의 6%를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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