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경제 망치고 이념 투쟁에 올인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회> ◇21세기 서구에서 진행 중인 “문화혁명”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크고 작은 ‘문화혁명’이 지속되는 듯하다. 2017년 3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자 조단 피터슨(Jordan Peterson, 1962- )이 멀지 않은 맥매스터 대학 캠퍼스를 방문했다. 그는 “PC(정치적 올바름)와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강연을 할 계획이었다. 강의실엔 1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격렬한 시위대의 항의로 피터슨은 강연을 못하고 말았다. 일부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싶다”고 외쳤지만, 과격한 소수가 결국 다수를 압도했다. 2016년 캐나다 하원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의 인권보호를 위해 그들을 호칭할 때 원하지 않는 특정 대명사의 사용을 금지하는 이른바 C-16 법안을 통과시켰다. 피터슨은 그 법안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했던 소수파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그날 시위대는 “혐오발언엔 표현의 자유 없다(no freedom for hate speech)”라는 구호를 내걸고 “트랜스 공포증 똥덩어리(Transphobic piece of shit)”란 욕설을 외쳐댔다. 피터슨은 시위대를 향해 당당하게 집단적 사유를 버리라 촉구하며, 논리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2017년 3월 17일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 피터슨 교수가 시위대에 휩싸여 있다. 사진 https:
제이콥은 그날 현장에 있었다. 머잖아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피터슨 교수의 '열두 가지 인생의 법칙'을 정독했고, 시위대의 항의가 한 "정교한 사상가"에 대한 부당한 폭력이라 생각했다. 이후 그는 바로 그날 피터슨 교수를 캠퍼스로 초빙했던 동아리 "차이를 극복하라!(Overcome the Gap)"에 가입해서 주요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했다. 첫 강의가 끝난 후, 그가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마오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해놓고선 비판지식인들을 숙청했다 하셨는데, 대기근이 발생한 후에도 중국인들은 마오를 전혀 비판하지 못했나요?
◇3~4년 사이 4500만명 사망, 참상을 어떻게 덮었을까?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은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다. 불과 3~4년 새 중국 전역에서 최대 4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약진은 대실패였다. 홍콩 언론이 풍자했듯 "대약진(The Great Leap Forward)"이 아니라 "대역진(大逆進, The Great Leap Backward)"이었다. 앞이 아니라 뒤로 달려간 혁명이었다. 제이콥이 중요한 질문을 했다. 대기근 이후에도 중국인들은 마오를 비판조차 할 수 없었나? 그는 어떻게 계속 절대 권력자의 권좌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물론 용감하게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1959년 8월 여산(廬山)회의에서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가 대표적이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마오를 향해 근본적인 정책수정을 요구한다. 격노한 마오쩌둥은 당장 그와 그의 직속 부하들을 파면한다. 펑더화이를 파면한 마오의 이미지는 명나라 충신 해서(海瑞, 1514-1587)를 파면한 가정(嘉靖) 황제를 꼭 빼닮았다. 1961년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희곡 '해서파관'을 베이징 경극단이 상연하면서 선풍을 일으킨다. 바로 이 희곡은 1965년 11월 말부터 전 중국에 몰아닥친 "문혁" 폭풍의 눈이 된다.
1967년 7월 홍위병 집회에서 비투(批鬪)당하는 펑더화이. 당시 69세.
펑더화이의 파면 이후 모두가 숨죽이며 마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결국 국가원수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가 나섰다. 1962년 1월 11일-2월 7일 대약진운동의 오류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7천인대회"가 열린다. 중앙과 지방정부의 주요 간부들 7천 명이 참석한 사상 최대 규모의 "중앙 공작회의"였다. 대약진운동의 성과와 실패를 점검하는 이 대회에서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대기근의 "3할이 천재(天災), 7할이 인화(人禍)"라 선언한다. 마오를 겨냥한 예리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는데, 놀랍게도 마오는 그 자리에서 대참사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순순히 인정한다. 빅브라더의 인간선언일까? 과연 그는 진실로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했을까? 7천인대회 이후 마오는 베이징을 떠나 남방을 순회한다. 중앙의 제1선을 류샤오치에 맡긴 후, 스스로 제2선으로 물러난 셈이었다. 일단 그 정도에서 책임추궁은 멈췄다. 대기근의 책임에선 중공중앙의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대약진운동 당시 중공 중앙위원들은 모두 혁명열(革命熱)로 "머리가 더워져서" 마오의 급진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이념투쟁 "사회주의 교육만이 수정주의를 막는다!" 마오쩌둥은 제2선으로 물러났지만, 그의 상징적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다. 최고영도자 마오는 경제를 망친 후 이념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이념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1960년 마오는 이미 농촌에서 반(反)부패, 반(反)낭비, 반(反)관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삼반운동"을 일으켰다. 곧 이어 그는 정풍·정사(整風·整社)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농촌에선 간부들의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모두 중앙의 무리한 할당량을 맞추려는 지방의 자구책이었지만, 마오는 바로 그런 악질 간부들이 모두 국민당 잔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1962년 9월 마오는 부르짖었다.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1963년 2월 류샤오치의 연설 중에 마오쩌둥이 끼어들며 발언했다. "요즘 돼지고기 세 근, 담배 몇 갑 정도에 매수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 오직 사회주의 교육만이 수정주의를 막을 수가 있다!" 이로써 사회주의 교육운동(1963-1966)이 개시되었다. 정치, 경제, 조직, 사상 측면에서 모든 부패를 일소하는 사청운동(四淸運動)이었다. 교육운동이 아니라 실제로는 숙청의 시작이었다. 그 2~3년의 세월 동안 7만7560명의 간부들이 학살됐고, 도시와 농촌에서 532만7350명이 박해를 받았다. 5760개의 사회조직이 반당·반사회주의 집단으로 몰렸으며, 27만6250명이 적대세력으로, 또 55만8220명이 인민내부의 모순세력으로 지목돼 고난을 당했다. 많은 학자들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문화혁명의 전초전이라 해석한다.
1965년 3월. 헤이롱장(黑龍江)성 아청(阿城)현 아선허(阿什河) 공사 둥환(東環) 대대의 사청운동의 대적(對敵) 투쟁 대회의 한 장면: 사진 리전성(李振盛)>
대기근을 일으킨 후 마오는 어떻게 비판의 화살을 피해 갈 수 있었는가? 우선, 그가 벌였던 숱한 정치운동에 주목해야 한다. 실정을 가리기 위해 그는 계급투쟁의 깃발을 흔들었고, 반혁명세력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모든 언론 통제, 대기근 실상 알려지지 않아 경제를 망치고도 마오가 비판을 피해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당시 중국의 모든 언론은 완벽하게 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대기근의 실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개개인의 기록도, 은밀한 입소문도 큰 전파력을 갖지 못한다. 고난의 실체험자들은 모두 소멸했고, 지방정부의 파편적 기록은 문서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때문에 아무도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마오의 오른팔로 군부를 장악한 린뱌오(林彪, 1907-1971)는 군대에서 먼저 마오에 대한 인격숭배를 개시했다. 머잖아 마오는 날마다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하는 인격신의 경지로 격상된다. 독재권력은 필사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기록을 윤색한다. 집체의 기억은 정치적으로 재구성된다. 인류의 역사는 너무나 쉽게 정치적으로 조작되고 편의적으로 왜곡된다. 나태한 지성은 절대로 역사의 실상을 알아낼 수 없다. 목숨을 건 역사투쟁 없이 진실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도 망각의 늪에 잠겨버릴 수 있다.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는 마오쩌둥 신화가 일깨우는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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