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브라더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9회> ◇음모 꾸미는 국가 속의 깊은 국가(deep state), 정부 속의 그림자 정부
국가 속에 더 “깊은 국가(deep state)”가 있다. 정부 안에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가 있다. 그들은 밤낮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정보를 조작하고 사실을 변조한다. 우리는 그들이 지어낸 판타지만 볼 수 있다. 그들이 꾸며낸 스토리만 들을 수 있다. 현실은 가상이다. 진실은 착각이다. 자유는 예속이다. 모르는 게 힘이다. 비밀을 지키려면 먼저 스스로를 속여야만 한다. 1948년 영국에서 작가 조지 오웰이 간파했듯, “지금도 빅 브라더께서 너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2020년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오늘의 현실일 수도 있다.
그는 국가 속에 더 깊은 국가를 세우고 정부 안에 그림자 정부를 만들었다. 그가 꾸민 음모는 치밀했다. 그가 친 덫은 촘촘했다. 그는 철두철미 스스로를 속여서 비밀을 유지했다. 스스로 100% 속았기에 그는 인민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 국가 속의 “깊은 국가”에 칩거하면서 그는 혁명의 시나리오를 썼다.
1981년 6월 27일 중공중앙은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66~1976년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은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 직접 기획해서 일으킨 일대의 동란이었다. 그 드라마의 “시즌 1 에피소드 1”은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서 끝까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이어가자! 혁명은 무죄다! 반란을 정당하다!" 문혁 당시의 포스터, chineseposters.net>
◇명나라 충신 다룬 우한의 해서파관(海瑞罷官) 처음엔 극찬… 반혁명 분자로 몰려
“해서파관”은 1961년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이 쓴 베이징 오페라단의 경극(京劇) 대본이었다. 해서(海瑞, 1514-1587)는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7)에 직언했던 명나라 충신이다. 우한은 명태조(明太祖, 재위 1368-1398)의 전기 ‘주원장전(朱元璋傳)’으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명대사(明代史) 연구자다. 문필가로 최고의 문명을 날렸던 그는 당시 베이징시 부(副)시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58년 12월 마오쩌둥은 후난성 창사(長沙)의 전통 악극 "생사패(生死牌)”를 관람한 후부터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고 훈시하고 다녔다. 허위 보고를 일삼는 간부들을 질타하기 위함이었다. 명대사에 정통한 우한은 마오쩌둥의 특명을 받아 ‘해서파관’을 썼다. 일곱 차례 수정을 거쳐서야 그는 간신히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대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명나라 수상 서계(徐階, 1503-1583)는 은퇴 후 귀향한다. 그의 아들 서영(徐英)은 부랑아다. 그는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고, 농민 조옥산(趙玉山)의 아들을 죽게 한다. 그도 모자라 조옥산의 손녀딸 소란(小蘭)이를 납치한다. 소란의 어머니 홍씨는 관아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나 매수당한 현령 왕명우(王明友)는 조옥산을 처형하고 홍씨를 쫓아버린다. 마침 응천부 순무(巡撫)로 부임한 해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서계는 해서에게 토지를 헌납할 테니 덮고 가자 제안한다. 해서는 불법 점유지는 백성의 것이며,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격분한 서계는 조정의 신하들을 움직여 해서를 탄핵한다. 신임 순무 대풍상(戴風翔)은 해서의 눈앞에 파면의 칙서를 내미는데, 해서는 황제의 직인을 보면서도 굽힘 없이 죄인들을 참수한다.
<1960년대 초반 베이징 경극단에 의해 상연된 역사학자 우한의 "해서파관". 우한의 역사극은 문화혁명의 불쏘시개로 이용된다. 공공부문>
극본이 발표되고 경극이 상연되자 언론의 찬사가 이어졌다. “풍부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관중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는” 수작, “역사연구와 현실참여의 능숙한 결합,” “옛날을 빌어 오늘날을 풍자하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전범 등등. 역사연구를 혁명의 무기로 활용했다는 긍정평가도 있었다. 마오쩌둥 역시 경극을 관람한 후 작품을 칭찬했다.
경극의 성공에 고무 받은 우한은 1961년 10월부터 1964년 7월까지 베이징시위원회 기관지 ‘전선(前線)’에 언론인 덩퉈(鄧拓, 1912-1966), 작가 랴오모샤(廖沫沙, 1907-1991)와 함께 우난싱(吳南星)이란 필명으로 60여 편의 풍자성 칼럼을 3년 간 연재한다. 풍부한 역사지식을 활용한 이들의 칼럼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큰 인기를 누린다.
1965년 11월 말 우한은 폭풍의 눈에 말려 들었다. 갑자기 그는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린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비판의 화살이 그를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렸다. 곧이어 덩퉈와 랴오모샤에 불똥이 튀었다. 두 사람이 나서서 우한을 변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이마에도 반혁명분자의 낙인이 찍혔다. 그들은 항변을 이어갔지만, 더 극심한 비난과 매도가 잇따랐다. 그들이 써온 모든 글들은 반혁명의 활동으로 매도되었다. 당시의 글을 하나 들춰보면 섬뜩한 언어에 머리칼이 솟는 느낌이다.
“이들의 반(反)당, 반(反)인민, 반(反)사회주의의 추악한 면모는 이미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공명정대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과 혁명 간부, 혁명적 지식인들이 ‘삼가촌’ 반당집단에 대한 올곧고 엄격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들의 글은 모두 ······· 독초들이다.”
<왼쪽부터 덩퉈, 우한, 랴오모샤, 문혁 초기 최초의 공격대상>
집단광기의 표적이 되어 수개 월 비난과 욕설에 시달린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섬세한 감성의 시인 덩퉈는 반년 간 지속된 집단적 언어폭력을 견디지 못했다. 1966년 5월 17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중공중앙이 저 유명한 “5.16통지”를 돌려서 문혁을 공식화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우한은 덩퉈처럼 자살할 기회도 없었다. 3년 간 홍위병 집회에 끌려 다니던 우한은 1969년 감옥에서 60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다.
◇마오쩌둥, 류사오치 숙청 위해 측근부터 잘라내
정부 안의 “그림자 정부”에서 마오쩌둥은 혁명의 시나리오를 짰다. 숙청의 “쓰리쿠션”을 치기 위함이었다. 우한은 베이징시장 펑전(彭眞, 1902-1997)과 절친했다. 펑전은 국가원수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의 측근이었다. 마오는 류를 실각시키기 위해 펑을 노렸고, 펑을 잡기 위해 우를 먼저 쳤다. 베이징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자르려는 의도였다. 우한은 결국 문혁의 불쏘시개가 되고 말았는데, 우한에 대한 마오의 뿌리 깊은 증오심도 작용한 듯하다. 그 점에 대해선 나중에 상술하기로 한다.
마오는 중공중앙이 장악한 베이징 대신 상하이를 혁명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상하이 배우출신 장칭(江靑, 1914-1991)을 내려 보내 그곳에서 문혁의 이너서클을 만들게 했다. 상하이 문예계의 중심인물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는 장칭과 긴밀하게 연결된 문화계 핵심인사였다. 장춘차오는 만34세의 신예 문학평론가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을 발탁했다. 이들은 이후 4인방의 핵심 멤버로 맹활약한다.
마오의 밀유(密諭)에 따라 야오원위안은 우한의 “해서파관”을 공격하는 비평문을 집필했다. 마오는 야오가 제출한 아홉 번 째 수정본을 출판 직전 세 차례나 직접 첨삭했다. 야오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평”은 18개의 미주(尾註)까지 달린 200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긴 글로 완성되었다. 국가 속의 “깊은 국가”에서 마오가 기획하고 감독하고 수정한 문혁의 뇌관이었다.
마오는 베이징의 언론을 뚫으려 했으나 ‘인민일보’는 야오의 글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득이 야오의 글은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의 ‘문회보(文滙報)’에 먼저 실렸다. 20일이 지나서야 같은 글이 ‘인민일보’ 5-6면 “학술연구”면을 장식하게 된다. 그 20일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문혁 당시 역사학자 우한을 공격하는 홍위병들. 위의 포스터에서 홍위병의 창살이 뚫은 "삼가촌(三家村)"은 우한, 덩퉈, 랴오모샤가 연재했던 칼럼을 의미한다. 우측상단을 보면, 한 홍위병의 손에 야오원위안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이 들려 있다. 공공부문>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중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의 건국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근대사를 서술한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최근 출간했다. 중국 근현대사 저작을 3부작으로 구상 중이며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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