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해방 정국의 풍경』 저자국가 경영에서 역사를 잊는 것도 비극이지만, 역사 논쟁이 과열돼 진영 논리로 비화하고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역사는 앞으로 가는데 뒤만 돌아보는 것은 앞의 걸림돌을 보지 못하는 위험과 함께 동력을 잃고 퇴행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고 연옥에 들어갈 때 수문장 피에트로가 “뒤돌아보는 이는 되돌아가리라”(『신곡』 연옥편)고 충고했다.
일본군 무장 해제하려고 점령
미 포고령, 소 호소문 확대 해석
무익한 논쟁은 국력 낭비일 뿐
해방 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은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이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실익 없이 국력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소련과 미국 모두 일본 식민지에 남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점령 사령관(Commander of Occupational Army in Korea)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75만 명이 있었는데, 그중 35만 명이 무장하고 있었다. 무장 군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관동군이 최후 항전을 위해 남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1946년 7월까지 이어질 것이며, 본토의 일본군이 항복하더라도 관동군은 항전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무장 해제가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지 한반도 해방은 관심사에서 빗겨나 있었다.
당시 ‘포고령’을 어떻게 볼 것인지도 논쟁이다. 1987년 필자는 포고령을 비교 분석한 글을 처음 발표해 논란을 일으킨 당사자이므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필자는 소련군의 포고령은 우호적이었으며, 미군의 포고령은 고압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글의 이어진 부분에서 그것은 문장 수사(修辭)의 문제였지 양쪽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진 교과서 파동에서 진보적 학자들이 나의 진의와 관계없이 앞부분만을 인용한 것을 보고 놀랐다.
문제의 핵심은 문투가 아니라 진입 군과 포고령 작성자의 성격이었다. 당시 미군 포고령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미국 육군 24군단장 존 리드 하지 장군(미 군정 사령관)의 참모들이 북상하는 함상에서 1945년 9월 2일 작성해 인천 입항 하루 전인 9월 7일 서울 인근과 대도시에 공중 살포했다. 철필로 등사한 포고령 문장은 일본어로 작성됐다. 24군단에는 한국어에 능통한 장교가 없었고, 당시 미군은 일본어가 국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 명의로 발표한 9월 7일 자 포고령도 있었다. 스스로 ‘동양의 카이사르’라고 생각한 맥아더다운 문장으로, 미군은 점령군임과 금지 사항을 적시했다. 문장은 영어로 썼기 때문에 식자들 사이에 알 만한 사람만 읽었다. 법 조문처럼 전문 6조로 된 이 포고령은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장군의 이름으로 배포한 호소문과는 격조가 달랐다. 그 호소문은 한글 경어로 북한 주민에게 배포됐다.
그러면 문장의 형식·문투·언어만 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고,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이는 당시 미군과 소련군 정치 장교들의 수준 차이는 물론이고, 수많은 위성국 통치 경험이 있는 소련군과 그렇지 못한 미군 장교의 기술 차이에서 온 것이었다. 한반도 진입 당시 소련군에는 백전노장으로 꼽히는 스티코프·로마넨코·레베데프 등 장군급 정치국원이 배속돼 순무(巡撫)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엄혹한 점령군이었다.
그와 달리 미군은 소련군에 필적할 만한 정치 장교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 사령관은 미국 육군사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정도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령관 밑에 조력자가 필요하자 미국은 1946년 초 뒤늦게 레너드 버치 중위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하버드대 출신인 버치 중위는 자신이 마치 신생국 창설의 주역인 것처럼 행세하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중위”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연해주 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 대장의 군사위원으로 경험을 쌓은 스티코프 상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한 정책의 본질을 설명하자면 어느 쪽의 선악 문제가 아니라, 소련의 노회함과 미국의 서툰 대결에서 미국이 비본질적인 결함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양쪽 다 할 말이 있고, 동시에 모두 결함이 있다. 이 싸움은 누가 이길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역사는 화해를 가르치는 것인데 적개심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잘못이 있다면 당시 지도자들이 못난 탓이었고, 그 허물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해방 정국의 풍경』 저자
[출처: 중앙일보] [특별기고] 미·소 해방군·점령군 논쟁 어떻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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