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반동의 후예는 반동”...홍위병, 광란의 대학살 [송재윤의 슬픈 중국]

bindol 2021. 7. 16. 09:54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3회>

 

<홍위병의 비투 장면. 절반만 삭발하는 “음양두(陰陽頭)” 처벌>

역사 상 수많은 권력자들은 편집증에 시달리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심신이 피폐해지기 때문일까.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의 비유대로 권력은 중기(重器)다. 한 평생 “무거운 그릇”을 얻기 위해 쟁투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교활하고, 치졸하고, 잔인해진다. 오죽하면 권력투쟁을 진흙창의 개싸움이라 할까. 계략, 음모, 사기, 술수, 협잡, 공갈, 협박, 식언, 망언, 망동, 거짓말, 린치, 테러···.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정치범죄의 사악함은 상상을 절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성년층을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 써먹는 수법이 최악이다.

미성년을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홍위병의 준동

전체주의 정권은 집요하게 청소년층을 파고 든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 파시스트 이태리의 바릴라(Ballia), 소련의 콤소몰(Komsomol) 등은 대표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준(準)군사적 청소년 조직들이었다. 2차 대전 막바지까지 가장 필사적으로 연합군에 맞섰던 독일병정들은 10대의 “히틀러 유겐트”였음은 잘 알려진 바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히틀러 유겐트”의 규모가 급팽창한다. 1939년 3월 이후 17세 소년들이 강제 징집 대상이 되고, 1941년 이후 10세 이상의 남녀 청소년이 모두 징집된다./ 공공부문>

어린 시절 “히틀러 유겐트”로 활약했던 저명한 역사학자 헤르만 그라믈(Hermann Graml, 1928-2019)은 당시 청소년들이 나치정권에 매료된 이유를 열거하면서 제 3라이히의 강력한 정치권력, 나치정권의 선전선동 및 애국교육, 비밀결사 형식의 조직 활동, 히틀러 인격숭배의 흡입력, 나치정권이 연출한 모던한 분위기 등을 꼽는다. 아울러 그는 나치정권이 청소년들에게 가부장적 질서와 종교적 권위 등 “전통과 금기”를 파괴하는 정치적 폭력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설명한다.

그라믈의 설명은 문혁 시절 홍위병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 최강의 권력기구였고, 중공정부는 이미 20년 공산주의 이념으로 청소년을 세뇌하고 훈습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살아 있는 인격신으로서 청소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사상은 “낡고, 늙고, 병들고, 뒤쳐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근대화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문화, 사상, 관습, 습관 등 “네 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네 가지 새로운 것”을 세운다는 이른바 “파사구(罷四舊) 입사신(立四新)”의 구호가 이를 압축한다. 결정적으로 마오쩌둥은 청소년들에게 초법적인 “반란”의 권리를 보장한 후, 그들을 정치투쟁의 최전방에 내몰았다.

1966년 7월 8일, 마오쩌둥이 부인 장칭에 쓴 편지엔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위해서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일으키겠노라!”란 말이 포함돼 있었다. 1966년 8월 “천하대란”을 일으킨 주체는 바로 홍위병이었다.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학살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0년대 후반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류사오치 겨냥...“사령부를 폭파하라!”

1966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중공중앙위원회 제8기 11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1966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필로 끼적였다. 이틀 후, 약간 수정된 그 글의 복사본이 전체회의에 배포했다. 200자 원고지 1장 분량의 짧은 글 속에서 마오쩌둥은 “지난 50일간 중앙에서 지방까지 어떤 영도 동지가 반동적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자산계급의 독재를 실행해 왔고,” “자산계급의 위풍을 조장하고 무산계급의 의지와 기개를 훼멸했다”고 비난했다.

마오가 “대자보” 속에서 언급한 그 “영도 동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국가원수 류샤오치였다. 마오의 창끝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목을 겨눈 상황인데, 마오는 어설프게 실명을 들어서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다. 문혁은 “대중노선”에 따라 대중의 의지대로 진행돼야 하는 민중의 혁명이었다. 마오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류와 덩은 혁명대중의 자발적 봉기로 권좌에서 축출되고 숙청돼야만 하는 “자산계급”의 주구(走狗)였다.

<그림 속의 누런 색 문건은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다. 벽보에는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가 적혀 있다.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 외친 “조반유리”와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구호는 홍위병 폭력으로 이어졌다. 1976년 8월 문화혁명 집단화보 창작팀의 작품. 1976년 9월 마오 사망 한 달 전까지도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구호가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증거/ chineseposters.net>

8월 8일 마오의 주도 아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공중앙위원회의 결정 16조”가 채택된다. 그 대강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문혁은 군중이 스스로 해방되어 자발적으로 혁명을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다. 마오주석이 즐겨 말하듯 누구든 수영을 배우려면 직접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사회주의 혁명투사로 거듭나려면 직접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마오쩌둥 사상 대중노선의 원칙에 따라 중공중앙은 무조건 "군중을 신뢰하고,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의 지휘를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손을 놓고 군중을 발동(發動)시켜야만” 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인구의 5%에 불과한 “가장 반동적인 우파들,” “극단적 반동 자산계급 우파분자들”을,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들을 고립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95%의 인민이 대동단결을 해야만 한다. 인민의 단결을 위해선 문혁소조, 문혁위원회, 문혁대표대회가 군중노선의 구심이 돼야 한다.

16조의 마지막은 “마오쩌둥 사상이 문혁의 지도이념”이라는 테제다. 요컨대 16조는 마오쩌둥 사상과 군중노선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중공중앙의 공식 문건이다. 16조의 행간 마다 류샤오치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읽힌다. 그가 바로 투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군중을 억압한 반동집단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전체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류샤오치의 몰락은 이미 공식화됐다. 중공중앙 정치국상무위원회 서열 제6위였던 린뱌오가 제2위로 올라가고, 서열 제2위의 국가원수 류샤오치는 제8위로 밀려났다.

<1966년 8월 9일자 인민일보의 제 1면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위원회의 결정 16조가 게재됐다. 16조는 이후 문화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의 기본원칙이 된다.>

때려죽이고, 매달아죽이고...10대 홍위병, 잔혹한 학살극

“혁명은 무죄다!” “혁명은 곧 폭동이다!” “반란은 정당하다!” “사령부를 폭파하라!” “낡은 것을 파괴하라!” “혁명을 일으켜야 혁명을 배운다!” 1968년 8월 공적 매체를 통해 날마다 전 중국에 하달되고 있던 마오쩌둥의 행동 명령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은 바로 “군중의 자발적 반란”이었다. 군중의 자발성을 억압하는 모든 조치는 반동적 자산계급의 음모로 인식되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홍위병 조직은 일시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대학 및 중등학교에 국한됐던 홍위병의 활동은 초등학교까지 확산되고, 수개월 후면 급기야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운동으로 비화된다.

당시 언론에선 일언반구도 다루지 않았지만, 그해 여름 베이징에선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졌다.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난 홍위병 폭력은 “1949년 해방” 이전의 지주, 자본가 및 그 후예를 지칭하는 ‘계급천민’과 반동적 지식분자들에 가해졌다. 홍위병은 “반동의 후예는 반동”이라는 이른바 "혈통론(血統論)을 처형의 이유로 내세웠다. 사회주의 혁명이 빚어낸 새로운 신분제가 아닐 수 없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민가를 급습해 샅샅이 뒤지고 터는 “초가(抄家)”의 폭행을 일삼았다, 그들은 모든 유물을 박살내고, 계급 적인(敵人)을 색출해 살육하는 백주의 테러를 이어갔다. 베이징의 창핑(昌平)현과 다싱(大興)구에선 특히 잔혹한 학살극이 펼쳐졌다.

비판적 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기록에 따르면, 곤봉으로 때려죽이고, 작두로 썰어 죽이고, 밧줄로 매달아 죽이고, 심지어는 영유아의 팔다리를 짓밟고 당겨 찢어 죽이는 광란의 대학살이었다. 1980년 “북경일보” 12월 20일자는 1966년 8월-9월 사이 베이징에서 홍위병에게 “맞아 죽은” 피해자의 숫자가 1772명이라 보도하고 있다. 10대의 청소년들이 대체 어쩌다 이토록 잔혹한 학살극의 주역이 되었나?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22회>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결합...군중 앞세워 인민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