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공정성 잃은 경찰과 군대...좌파의 혁명인가, 반란인가

bindol 2021. 7. 16. 10:27

공정성 잃은 경찰과 군대...좌파의 혁명인가, 반란인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7년 7월 20일 사건 당일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타고 진격하는 “백만웅사.” /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38회>

 

경찰이 공정성을 상실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군대가 중립성을 거부하면 어떤 상황이 야기될까? 경찰이 정권의 반대세력엔 철퇴를 가하고 우호세력엔 솜방망이를 쓴다면? 군대가 노골적으로 한 사회의 특정 세력만을 엄호하고, 지원하고, 나아가 병기를 배급해 무장시킨다면?

반(反)독재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군경(軍警, 군대와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생명으로 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는 군경의 계급적 당파성을 강조한다. “당이 총을 지배한다”는 마오쩌둥의 원칙에 따르면, 중국의 군대란 공산혁명의 무력 기반일 뿐이다.

1967년 1월 말, 수많은 군중조직이 난립하는 무정부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을 향해 “혁명적 좌파군중을 지지하라!” 지시했다. 1967년 1월 23일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 중앙군사위, 중앙문혁소조와의 공동명의로 이른바 지좌(支左, 좌파 지원)의 명령을 하달했다. 군대에 적극적으로 계급적 당파성을 발휘하라는 주문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좌파” 무장투쟁 격화

마오의 예상과 달리 혼란은 가중됐다. 군대가 한쪽 편을 “혁명적 좌파군중”이라 선언하는 순간, 다른 편은 반혁명적 우파의 낙인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기방어의 필요 때문에 좌·우파 군중집단 모두 “마오쩌둥 사상 만세!”를 외치고 “우리가 진정한 좌파!”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개입은 결국 무장투쟁을 증폭시키고 격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1967년 1월부터 이미 각지의 인민대중은 갈가리 찢겨서 반대세력을 반혁명집단이라 낙인찍는 극심한 내전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1967년 봄, 정치적 학살이 시작됐다. 1967년 7월에 이르면, 후베이(湖北), 장시(江西), 쓰촨(四川), 윈난(雲南), 후난(湖南), 허난(河南), 허베이(河北) 등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무장투쟁의 종식과 혁명적 좌파군중 영도 하의 ‘대연합’을 문혁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67년 7월 초 마오쩌둥은 남방의 주요 도시를 순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한을 남순(南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한은 동서남북으로 아홉 성(省)으로 이어지는 수륙(水陸)교통의 요충이며, 1911년 신해혁명의 발상지로서 정치적 상징성이 컸다. 1966년 7월, 마오쩌둥은 우한의 창장(長江)에서 노익장을 과시했었다. 1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창장에 들어가 건재함을 과시할 계획까지 세웠다.

<1967년 7월 15일 우한. “보수파” 백만웅사(百萬雄師)의 습격으로 사망한 동지들의 시신을 들고 시위하는 화궁(華工) 조반파 학생들의 시위 장면. 문혁 당시 무장투쟁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공공부문>

마오 “천자이다오, 노선 착오를 인정하라!”

마오쩌둥은 1967년 7월 14일 저녁 우한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밤 우한에서는 10명이 사망하고, 117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마오는 서둘러 공인총부의 복권, 구속자 전원 석방, 우한 군구의 공인총부 지지 등을 골자로 한 우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곧 이어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지시에 따라 우한 군구의 책임자들을 불러서 나흘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이어갔다.

저우언라이는 우한 군구의 ‘노선 착오’를 지적하고, 우한 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와 정위(政委, 부사령관) 중한화(鐘漢華)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노선 착오’란 좌파군중 대신 우파군중을 지지한 오류를 이른다. 군구의 사령관이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구분조차 못했다면, 중죄가 아닐 수 없었다. 천자이다오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7월 18일 저녁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앞에 천자이다오와 중한화를 데려갔다. 마오쩌둥은 우한 군구의 공과를 논하면서 “지공(支工)·지농(支農)의 공(功)은 인정되나 지좌의 착오는 과(過)”라 말했다. 노동자, 농민의 지원에선 성과를 보였으나 결정적으로 “보수파” 백만웅사를 지원함으로써 진정한 좌파군중을 억압했다는 비판이었다. 착오를 절대로 인정할 순 없다며 항변하는 천에게 마오는 문혁의 혼란 속에서 착오는 다반사이며, 조반파든 보수파든 대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천을 파면하는 대신 대연합의 대표로 쓸 뜻도 있음도 넌지시 내비쳤다. 잔뜩 긴장한 천에게 출구를 살짝 열어준 셈이었다.

 

7월 19일, 결국 천자이다오와 중한화는 우한 군구의 노선 착오를 인정하는 자아비판을 실시한 후, 곧이어 조반파 공인총부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는 파격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군부에 짓눌려 해체됐던 조반파 공인총부는 극적으로 소생했다. 그 사실을 접한 우한 군구의 부대원들과 백만웅사의 조직원들은 격분했다.

‘보수파' 백만웅사 격분...전면적 내란 상황

7월 20일 새벽 5시 10분, 8201부대의 군용트럭 21대, 선전차 6대, 지프차 3대, 세단 1대가 줄이어 둥후(東湖)빈관의 후문으로 들이닥쳤다. 백만웅사의 무장차 41대와 우한 공안(公安)의 대형 소방차 3대가 뒤를 따랐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 마오가 머물고 있음은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표적은 국무원 부총리 셰푸즈(謝富治, 1909-1972)와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1-1996)였다. 백만웅사는 셰푸즈와 왕리가 간신배처럼 중간에서 우한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난 군인들은 결국 셰푸즈와 왕리를 체포해서 1.6킬로미터 밖의 우한 군구 사령부로 끌고 갔다. 그들은 공격적인 언사로 백만웅사를 모욕했던 왕리에 앙심을 품고, 그를 심하게 구타해 골절상을 입혔다. 지방의 군부대가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을 잡아서 고문을 하는 군사반란의 상황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에까지 보고된 후에야 군인들이 왕리를 풀어주면서 일단락되지만, 백만웅사와 성난 군인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게 이어졌다.

<우한의 “보수파” 백만웅사가 버스를 개조해서 무장투쟁에 사용한 장갑차. 장갑차의 옆에는 “백만웅사는 큰 강을 건넌다!”와 “우귀사신(牛鬼蛇神)을 다 쓸어버려라!”의 구호가 적혀 있다./ 공공부문>

8201부대는 성명서를 발표해 “공인총부는 반혁명세력이며, 백만웅사가 진정한 혁명적 좌파조직”이라 천명한다. 백만웅사 역시 긴급 호소문을 발표해서 8201부대와 함께 결사항전에 나서겠다 맹세한다. 우한은 전면적인 내란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 2시 경 마오쩌둥이 극비리에 숙소를 떠나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탈출해야만 했던 비상사태였다.

격정적으로 들고일어났건만, 백만웅사와 8201부대의 저항은 오래 갈 수 없었다. 1967년 7월 23일자 <<인민일보>> 제1면엔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한 셰부치와 왕리를 저우언라이, 장칭, 캉성 등 중앙정부의 거물들이 직접 공항에까지 나가서 환영하는 사진이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었다.

<1967년 7월 23일자 인민일보 제1면. “셰푸즈와 왕리 동지가 영광스럽게 베이징에 돌아오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 장칭 등 중공중앙과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사들이 일제히 나가서 우한에서 고초를 겪고 힘겹게 귀환한 셰푸즈와 왕리를 환영하는 장면/ 인민일보>

그 한 장의 사진은 중공중앙, 특히 마오쩌둥의 의중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셰푸즈와 왕리의 귀환을 환영함으로써 <<인민일보>>는 그들을 억류했던 우한 군구가 반란집단임을 전 중국에 공표했다. 이후로도 계속 며칠간 <<인민일보>>는 백만웅사를 반혁명세력이라 낙인찍고, 우한의 군사반란을 규탄하는 사설과 기사를 연달아 내보냈다. “혁명적 좌파조직”을 자임하며 “마오쩌둥 사상의 보위”를 외치던 백만웅사는 중앙정부에 맞설 능력도, 의지도, 명분도 잃어버린 듯했다.

이로써 백만웅사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했지만, 조반파의 보복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후로 수개월에 걸쳐 후베이성 전역에서 폭행과 학살이 일어났다. 우한에서만 6만6000여 명이 상해를 입고, 600여 명이 학살됐다. 후베이성 전역에선 백만웅사에 연결된 18만4000여 명이 구타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계속>

<1967년 7월 우한 사건 당시 우한 군구를 비판하는 조반파의 구호. “우한 군구는 반드시 셰푸즈와 왕리 두 분 수장의 안전을 보장하라!”/ 공공부분>

#송재윤의 슬픈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