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위헌적 특별법을 만든다? 법치가 무너지는 신호

bindol 2021. 7. 16. 10:24

위헌적 특별법을 만든다? 법치가 무너지는 신호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16년 중국 신장 지역 위구르 시위의 한 장면/ Wikimedia commons>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36회>

 

문명은 법치(法治, rule of law)다. 인치(人治, rule of man)는 반(反)문명이다. 인치의 상황에선 다수 인민이 통치자의 감정기복과 정치판단에 지배당한다. 최고영도자 한 명이 국가적 중대사의 최종결정권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일인에 집중되면 보편적인 법의 정신이 훼손된다. 불편부당한 법의 지배가 무너진다.

법치 붕괴의 첫 징후는 위헌적 특별법의 제정이다. 무슬림의 종교행위를 제약하는 중국의 특별법은 중국 헌법조항에 비춰보면 다분히 위헌적이다. 과거의 한 사건만을 특정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특별법의 제정은 정치적 입법의 혐의가 짙다. 인치란 결국 특별법이 일반법을 저촉하고 보편가치를 훼손하는 헌법파괴의 상황을 이른다.

인치에 대항하여 근대 입헌주의자들은 “법의 지배”를 제창했다. “짐(朕)의 명령”이 곧 “특별법”이 돼버리는 전제주의(despotism)를 비판하면서 입헌주의자들은 언론, 집회, 결사, 양심의 자유 등 보편가치를 수호하는 “보편 입법”의 원리를 설파했다.

인류 근대사에서 법치의 확립은 인간해방의 정치혁명이었다. 입헌주의 정치혁명의 결과, 오늘날 대다수 현대국가의 헌법에는 인권선언과 자유권 조항이 명시돼 있음에도······. 당리당략에 빠진 권력집단은 엉터리 특별법을 만들어 헌법의 기본정신을 무너뜨린다.

민주집중제 내세워 일당 독재 합리화

오늘날 중국은 입헌주의 정치혁명을 부정하는 세계 최대의 “예외적” 국가다. 중국헌법에 명시된 인민민주독재와 민주집중제는 일당독재를 합리화하고 일인지배를 정당화하는 반문명적 권력집중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1949년 10월 1일 건국 이래 1976년 9월 9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철저하게 법치가 파괴된 전제적 일인지배의 과정이었다.

마오쩌둥이 “인민공사가 좋다!”라 한 마디 하자 전국엔 독버섯처럼 죽음의 인민공사가 돋아났고, 그 결과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이 발생했다. 그가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하자 전국의 청소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가상의 적인(敵人)들을 향한 홍색 테러를 저질렀다. 그가 “사령부를 폭파하라!” 명령하자 전국에선 탈권(奪權, 권력탈취)의 기치를 내건 군중조직들이 마구 출현해 총칼을 들고 맞부딪히는 무장투쟁이 전개됐다.

<마오쩌둥의 대자보, “사령부를 폭파하라!” 1966년 8월 5일 마오가 작성한 대자보는 이후 전국적인 “탈권” 운동의 불씨가 됐다./ 공공부문>

실제적 내전의 수습을 위해 마오는 군을 파견한 후 “군은 좌파군중을 지원하라!” 명령했지만, 모든 조직들은 자신들이 “좌파”라 주장하며 반대편을 “우파”로 몰아가는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좌우가 헷갈리고 시비가 엇갈리는 정치적 카오스였다. 그 모든 혼란은 결국 통치자가 절대권위를 갖는 반문명적 전제주의와 인격숭배의 불합리에 기인했다.

1967년 우한, 무정부적 혼란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1967년 여름 후베이성 우한에서 펼쳐졌다. 1966년 11월부터 1967년 1월 초까지 우한에는 조반파(造反派)와 보수파(保守派) 양 진영에서 수십 개의 군중조직이 출현해 난립하며 상호 격돌하는 무정부적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다. 1966년 11월 초 우창(武昌)에 최초의 노동자 조직이 결성된 후, 한커우(漢口), 칭산 등의 철강 단지에도 대규모 조반파 공인조직이 출현했다. 이들은 대부분 마오쩌둥 사상을 선양하며 지방정부의 권력교체를 부르짖는 “탈권(권력 탈취)” 투쟁의 조반파였다.

이에 대항하는 “보수파” 노동자 조직들도 생겨나서 40만의 조직원을 확보했건만, 베이징의 불승인이 떨어지자 1967년 1월 첫째 주 “보수파” 조직은 해산되고 말았다. “보수파”가 물러서자 “조반파”는 더욱 거세게 지방정부의 권력을 빼앗는 “탈권” 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물론 당시 우한의 상황은 1967년 “상하이 1월 혁명” 이후 인근의 지방정부는 마비상태가 되는 전국적 상황과 맞물려 돌아갔다.

마오가 군중조직의 대연합을 촉구했음에도 군중 조직들 사이의 좌우대립은 내전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에 마오는 군의 개입을 결정한 후, “좌파 군중” 및 “혁명적 간부들”과 연대해서 혁명위원회를 결성하라 촉구했지만, 문제는 군대가 중앙문혁소조의 눈에 “우파”로 보이는 군중집단을 “좌파”라 인정하고 지원했다는 점이었다.

 

1967년 2-3월 우한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 1909-1993)는 잔뜩 위축돼 있던 우한의 “보수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군대의 지원을 받자 보수파 군중조직은 순식간에 거대한 규모로 급성장했다. 1967년 3월 17일, 우한군구는 공인총부회를 불법조직이라 선언하고 485명의 대표들을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사흘 후, 사령관 천자이다오는 우한의 전역에 공인총부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당 정책 따르면 좌파, 법과 질서 어기는 자들이 우파”

“누가 좌파인가? 누가 우파인가? 당의 정책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 ‘좌파’다. 법과 질서를 어기면서 탈법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이 바로 ‘우파’다······. 부르주아지도 조반파들처럼 야만적이진 않다. 그들이 보수파라 부르는 집단이 실제로는 진정한 좌파세력이다.”

<“[우한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의 개 대가리를 잘라서 우리들 열사의 영웅적 혼령에 제물로 바치자” 문혁 시절 포스터를 보면, 투쟁 대상의 이름자를 뒤집고 엑스자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1967년 우한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를 비판하는 조반파 공인총부의 포스터/ 공공부문>

군부에 의해 “우파”의 낙인을 받은 우한의 공인총부는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군대의 지원을 받은 군중조직은 120만의 조직원을 자랑하는 백만웅사(百萬雄師)로 급성장했다. 인민해방군, 혁명적 군중조직 및 혁명적 간부집단의 3결합이 완성되는 듯했지만······. 바로 이때 최고영도자 마오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다시금 급반전됐다.

1967년 2월 말, 군부의 최고위 장성들이 집체적으로 문화혁명의 법질서 파괴를 비판한 “2월 역류(逆流)”라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군부에 대한 반격으로 마오는 1967년 4월 6일 중앙군사위원회 “10조 명령”을 반포했다. 군부의 “지좌(좌파 지원)” 원칙을 구체적으로 밝힌 “10조 명령”은 군중조직을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거나 반혁명세력으로 몰아 체포하는 군부의 자의적 개입을 최소화했다. 마오가 군부를 제약하자 기사회생한 우한의 조반파는 다시금 전면적 투쟁에 나섰다.

우한 군구의 저항도 완강했다. 천자아다오는 특별조사단을 조직해 조반파 공인총부가 반혁명세력임을 증명하는 법적 투쟁에 돌입했다. 3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우한 군구는 공인총부를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했다. 군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 백만웅사는 공인총부를 해체하고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에 맞서 “조반파” 공인총부는 조직의 복원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결사항전에 나섰다.

<1967년 여름 희생자의 시신을 운구하는 우한의 군중세력. 사진/ 중국인터넷>

우한의 학살극...마오쩌둥, 비행기로 피신하다

그해 5-6월 우한의 무장투쟁은 악화되어 잔혹한 학살극이 이어졌다. 어린 소년들이 돈을 받고 조직적 학살에 가담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반파가 제시한 통계에 의하면, 1967년 4월 29일에서 7월 말까지 174번의 무력충돌이 벌어져 158명이 죽고, 1060명이 부상을 입었다. 후베이성 전역에서 18만 4000명의 사상자를 초래한 본격적인 내전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1967년 6월 14일 중앙문혁소조는 우한군구에 무력 사용의 중단을 촉구한 후, 좌우 양측의 대표단을 베이징에 초빙해 사태를 수습하는 대타협의 출구를 제시했다. 7월 10일, 저우언라이는 회의 장소를 우한으로 바꾼 후, 7월 14일 사태의 수습을 위해 우한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공안부장 셰푸치(謝富治, 1909-1972)와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2-1996)가 따라갔다.

1967년 7월 무장투쟁이 쓰촨, 윈난, 후난, 장시, 허난, 허베이 지역까지 번지고 있었다. 당시 전국의 상황을 “당파 전쟁”이라 규정한 마오는 극비리에 호화열차를 타고 우한으로 달려갔다. 우한 사태를 수습해서 평화적 분쟁 종식의 모델을 제시하려 했던 듯한데······.

1967년 7월 20일, 왕리가 호텔로 급습한 군인들에 붙잡혀 군부대로 질질 끌려가 폭행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그날 새벽 2시 우한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급히 도망가듯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야만 했다. 중공중앙은 최고영도자의 항공 여행 자체를 금지해 놓은 상태였다. 천하의 마오가 늘 타던 기차에 오를 여유도 없이 스스로 극구 꺼리던 비행기를 타고 피신해야만 치욕의 순간이었다. 대체 그날 우한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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