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한 투쟁? 본질은 시기, 질투, 탐욕, 증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1962년 초 “7천인 대회” 추정/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2회>
트로이 전쟁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의 질투에서 시작됐다. 피비린내 나는 10년 전쟁도 결국 감정의 미망에서 시작됐음을 일깨워주는 고대 그리스신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사회의 모든 갈등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한다. 그들의 이론이 과연 그리스신화보다 설득력이 있을까? 류샤오치에 대한 마오쩌둥의 공격이 계급투쟁이었나?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시기가 계급감정이었나? 인간의 갈등을 설명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은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정치투쟁, 명분 내세운 막장 드라마
정치투쟁은 본질적으로 멜로드라마다. 권력자들이야 노상 심각한 척 거대 명분을 들먹이지만, 속임수, 거짓말, 허언이 아니라면 어쭙잖은 변명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그들은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등 어두운 감정의 노예가 되어 싸움을 한다. 늙어도 권력자들은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어른 연기에 달통한 ‘못된 악동’일 뿐이다. 인류의 비극은 다수대중이 너무나 쉽게 ‘못된 악동’의 어른 연기에 현혹된다는 점이다.
정적의 제거를 위해 ‘못된 악동’은 함정을 파고 그물을 친다. 권력자들은 소설가 못잖게 이야기를 잘 지어낸다. 개연성 없는 드라마는 외면당하며, 허술한 정치모략은 금방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 해서 역대의 권력자들은 허위날조, 문서조작, 통계왜곡, 증거인멸, 위증교사, 공갈협박, 음해공작, 중상모략, 선거개입, 린치테러, 암살명령, 위장자살, 법관매수, 언론장악, 전쟁협박, 무력도발, 존속살해, 대량학살 등등 온갖 암수범죄와 권모술수를 써서 치밀한 정치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짠다. 다수대중을 완벽하게 속여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 반역자” 찾아 이미지 덧씌우기
1959년 마오쩌둥의 양위(讓位)로 국가주석의 지위에 오른 류샤오치는 1962년에서 1966년까지 실제적으로 중국을 지배한 실무정치의 핵심인물이었다. 천하의 마오쩌둥이라 해도 그런 인물을 함부로 쉽게 칠 수는 없었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 따위는 전혀 아니었다. 격정에 휩싸여 허술하게 류샤오치를 제거할 경우, 7억 5천만의 인민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 혹시나 인민이 류샤오치를 지지하거나 동정하게 된다면, 더 큰 낭패는 없을 터였다.
때문에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 인민을 영구히 갈라놓을 수 있는 치밀한 숙청의 드라마를 준비했다. 늦어도 1963년 초부터 마오쩌둥은 이너서클(inner circle)의 모사꾼들을 총동원해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그 최초의 포탄은 상상도 못할 극비의 기지에서 발사됐다.
1963년-1964년 중국의 역사학계엔 난데없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 1823-1864)에 관한 일대 논쟁이 일어났다. 1963년 8월 <<역사연구>>제4기에 발표된 32세의 선전원 치번위(戚本禹, 1931-2018)의 역사비평 “이수성 자술 비평”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수성이 누구인가? 왜 갑자기 그가 역사논쟁의 핵으로 부상했나?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天京, 남경)에서 청군에 포위된 이수성은 왕세자를 데리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하지만, 사흘 후 생포되고 말았다. 그는 옥중에서 5만자에 달하는 “이수성 자술(自述)”을 집필했다. “태평천국”의 역사를 소상하게 까발린 생생한 사료다. 놀랍게도 “자술”에서 이수성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증국번(曾國藩, 1811-1872)에 아첨하는 발언까지 남겼다. 그럼에도 1864년 8월 7일, 이수성은 남경에서 처형됐다.
<태평천국의 충왕(忠王) 이수성이 체포된 후 직접 썼다는 “이수성 자술(自述)”/ 공공부문>
당시 중국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이수성을 구국영웅이라 칭송했다. 장렬한 옥쇄(玉碎) 대신 위항(僞降, 거짓 투항)을 택하여 태평천국의 잔존병력에 대한 청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는 해석이었다. 주류의 역사해석을 비판하면서 치번위는 이수성을 반역자라 단정했다. 학술계와 문예계의 전문가들은 치번위의 비평에 격렬히 항의했다. 중공중앙 선전부에선 저우언라이의 주재 아래 20명의 역사학자들이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다. 관영매체의 선동가 치번위는 본래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치번위의 역사왜곡과 논리비약을 질타했다.
그렇게 논쟁이 종결되나 싶었는데, 마오쩌둥이 슬그머니 개입했다. 논쟁을 예의주시하던 마오쩌둥은 심복들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마오의 부인 장칭이 치번위에게 귀띔했다. “주석께서 지지하시니 걱정 말라!” 치번위는 1964년 <<역사연구>>4기에 이수성을 반역자라 단정하는 두 번 째 비평을 실었다. 마오의 의중을 짚은 치번위는 100년 전의 이수성을 다시 불러내 광장의 사형대에 세웠다. 이로써 이수성은 돌이킬 수 없는 반역자가 됐다. 더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심(毛心)을 따라 움직이며, 모풍(毛風)이 일면 바싹 엎드리는 잔풀처럼 연약했다.
<문혁 당시 마오쩌둥을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핵심인물들: 왼쪽부터, 장춘차오(張春橋), 장칭(江靑), 저우언라이, 야오원위안(姚文元), 마오쩌둥, 치번위(戚本禹), 왕리(王力), 관펑(關鋒), 무신(穆欣)/ 공공부문>
“국민당서 출옥한 61명의 반도(叛徒) 집단”
1963년 갑자기 이수성을 불러내 반도(叛徒)의 낙인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1936년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출옥을 위해 “허위로 자수했던” 61명의 혁명가들을 모조리 반역자들로 몰아 단죄하기 위함이었다. 문혁 개시 3년 전부터 마오는 여론의 호수에 독을 바른 밑밥을 뿌리고 있었다.
61명 모두 1930년대 국민당이 지배하던 이른바 백구(白區, 백색지구)에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하던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백구에서의 혁명운동은 위험천만의 활동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활약하던 혁명가들은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면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끝까지 저항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최대한 신원을 숨긴 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출옥하는 게 가장 현명한 생존의 전술이었다.
1930년대 중공중앙은 백구 혁명가들의 허위투항에 관해 꽤나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1936년, 일본의 침공을 앞둔 상황에서 국민당 감옥에 갇혀 있던 보이보(薄一波, 1908-2007), 류란타오(劉瀾濤, 1910-1997), 안자문(安子文, 1909-1980) 등등 61명의 신변이 중요한 이슈로 급부상했다. 당시 북방국 총책이었던 류샤오치는 중공중앙 총서기 장원톈(張聞天, 1900-1976)에 이들이 국민당이 요구하는 자수의 절차를 밟고 출옥할 수 있도록 윤허해 달라 요청했다. 장원톈은 흔쾌히 류샤오치의 요청을 수락했다.
비밀리에 당의 뜻을 전달받은 61명은 국민당의 요구에 따라 이른바 “반공계사(反共啓辭)”를 작성한 후 출옥했다. 그들이 작성한 전향의 문서는 국민당 관판언론 <<화북일보(華北日報)>>에 게재됐다. “반공계사”는 공산당 활동을 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반공의 의지를 표명하고, 일체의 반동행위를 규탄하는 자수(自首)의 선언문이었다.
<반혁명수정주의분자 보이보(薄一波) 투쟁대회. 문혁 당시 보이보는 136번이나 비투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어 8대원로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인물. 보이보는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 숙청된 보시라이의 부친/ 공공부문>
출옥에 성공한 61명은 이후 형식적인 자아비판과 심문의 과정을 거쳐 공산당에 다시 입당했다. 이후 류샤오치는 61명 “자수분자”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주었다. 61명 중 41명이 문혁 당시까지 건재했는데, 그중 22명은 중앙위원회에 진출해 있었다. 마오쩌둥으로선 다수의 “자수분자”들이 류샤오치의 지원을 얻어 중앙 정치에 진출해 있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는데, 그들을 일시에 모두 반역자로 단죄하기도 쉽지 않았다.
1966년 11월 말, 톈진 난카이(南開)대학의 두 홍위병 집단들은 경쟁적으로 학내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과거의 신문들을 샅샅이 뒤져서 1936년 국민당에 허위로 자수했던 류란타오의 “반공계사”를 찾아냈다. 위항을 위해 국민당이 내민 자수의 양식에 서명만 했을 뿐이지만, 날마다 비투의 빌미를 찾는 홍위병들에겐 반역의 스모킹 건이었다. 홍위병이 발견한 류란타오의 “반공계사”는 곧 국무원 총리실까지 보고됐다. 저우언라이는 이미 심의를 거친 과거사이므로 덮고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마오쩌둥은 무심코 “조판(照辦, 그렇게 하라!)”이라 비시(批示)했는데······. 당내 반역자를 색출하는 홍위병 집단의 자발적인 혁명투쟁을 저지할 마오가 아니었다.
1967년 2월 3일 알바니아 사절단과의 접견식에서 마오는 처음으로 국민당에 투항했던 “61명 반도집단”에 관해 언급한다.
“[반혁명분자들 중엔] 국민당에서 물려받은 자들도 있소. 그들 중엔 국민당에 체포됐던 공산당원들도 있소. 그들은 당을 배신한 후, 신문에 반공선언을 게재했었소. 그때 우리는 그들이 반공분자들임을 간파하지 못했소. 그들이 대체 어떤 공적 절차를 거쳤는지 몰랐죠. 이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때 그들은 국민당 편에 서서 공산당에 저항하고 있었소.”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7302, 윌슨센터 디지털 아카이브)
류샤오치를 반역자로 몰기 위해서
상식적으로 포위 상태에서 적군에 투항해서 아군의 병력을 살린 장수는 변절자일 수 없다. 조조의 관영에서 장시간 후한 대접을 받았던 관우를 배신자라 부를 사람도 없다. 레닌(1870-1924) 역시 “좌익공산주의 소아병”(1920)에서 “자동차 강도에겐 돈, 여권, 리볼버, 자동차를 다 주고” 생명을 구하는 타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1930년대 백구에서 위항(僞降, 허위투항)의 전술을 써서 국민당의 손아귀를 벗어난 혁명투사를 반역자로 단죄할 근거는 희박했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미 1963년부터 이미 이수성의 이마에 반역자의 낙인을 찍어 놨음이 분명하다. 물론 단지 “61명 반도집단”만을 비투(批鬪, 비판투쟁)하기 위함이라면 이수성을 반역자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마오의 목표는 초지일관 국가원수 류샤오치였다. 그를 잡기 위해서 마오는 촘촘한 그물을 짰다.
이제부터 최후의 정적에 3중의 올가미를 걸어서 천천히 목을 조여 파멸시키는 잔혹한 권력자의 정치 멜로드라마가 시작된다. 3중의 올가미란 바로 류샤오치에 들씌워진 반도(叛徒), 내간(內奸, 내부간첩), 공적(工賊, 노동계급의 도적)의 누명을 이른다. <계속>
<반도, 내간, 공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제명하고 출당시키자! /chinesepost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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