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사관에 불지른 홍위병들...중 정부는 묵인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7년 8월 22일, 베이징의 영국대사관에 모여 시위하는 홍위병들. 그날 밤 10시 20분경부터 홍위병들은 관사의 창문을 깨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3회>
2021년 1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전화통화에서 “시진핑 주석의 견고한 지도”를 칭송하고 “중국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중국공산당의 관료주의, 언론통제, 인권유린, 패권외교를 비판하고, 대규모 소송까지 예고한 시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언론이 한국의 “아첨” 외교를 놓칠 리 없다. 중국의 관영매체는 대대적으로 문 대통령의 시 주석 칭송을 대서특필했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외교수사가 아니라 일관된 저자세 친중 외교의 연장이다. 2017년 12월 15일 베이징을 방문한 문 대통령은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하면서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에 동참”하겠다는 발언까지 했다. 외교사에 전례를 찾기 힘든 과공(過恭)의 비례(非禮)였지만, 중국지도부는 열 끼니 중 두 끼만 밥을 같이 먹는 모욕적인 대통령 홀대를 연출했다. 심지어 기자단을 폭행하는 반문명적 폭거까지 감행했다.
굴종적 대중외교, 엎드리면 밟힌다!
중국은 지금도 아편전쟁 이후 산산이 조각난 과거 중화중심주의 “조공질서”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국(大國)” 앞에서 작은 나라가 먼저 “소국(小國)” 의식을 드러내면, 큰 나라는 오히려 그 작은 나라를 더 무시하고 조롱하고 짓밟는다. 현대 외교 프로토콜의 기본원칙은 국가 간 상호평등이다. 바로 그 기본원칙을 영리하게 활용하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쥐고 흔들고 쩔쩔 매게 하는 외교의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중국 외교의 검은 역사를 꿰고 있어야 한다. 가령 1967년 8월 22일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영국 대사관에 난입해 불을 질렀던 바로 그런 사건을·······.
비틀즈 노래 “혁명(Revolution)”의 암시
“하지만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니면, 결국 누구와도 뭐 하나 이룰 수 없을 걸!”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1968년 출시된 비틀즈 명반 더블앨범 “The Beatles”(일명 “화이트”)의 제4면 첫 곡 “혁명1번 (Revolution No.1)”에 담긴 가사다. 마오쩌둥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작사자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은 당시 좌파세력의 반발을 샀지만, 이 노래는 지금까지 팝음악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레넌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왜 레넌은 그들에게 “마오 주석의 사진들을 들고 다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1967년 8월 22일 밤 베이징 홍위병들의 영국대사관 테러사건을 파헤쳐야만 한다.
<영국 록밴드 비틀즈의 명곡 “혁명(revolution)”엔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시위대의 얘기가 살짝 등장한다. 문혁의 절정에서 영국 대사관 방화를 계기로 당시 영국에서는 반중 감정이 일어났다. 폭력투쟁 대신 평화적 시위를 주장했던 레넌은 이 노래를 통해 당시 서구 지식문화계에 퍼져 있던 마오주의의 모순을 풍자했다.>
베이징 영국대사관, 불길에 휩싸이다
주중 영국 부대사 도날드 홉슨(Donald Hopson, 1915-1974) 경의 현장 보고서는 대충 다음과 같다. 1967년 8월 22일 1만 명의 홍위병 시위대들이 베이징 영국대사관 건물 앞에 운집했다. 그들은 커다란 조명등과 확성기를 설치한 후, 집회를 시작했다. 홍위병들은 대사관저 앞에 설치된 간이 무대에 올라 구호를 외치고 혁명가곡을 제창하고 연설을 이어갔다. 그날 밤 10시 20분경부터 홍위병들은 대사관저 바로 코앞까지 몰려가서 영국 대사관의 호위병들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건물 내부에 있던 23명의 영국인들은 즉시 건물 맨 아래층으로 피신했다.
홍위병들은 창문을 깬 후, 불붙인 짚단을 건물 안으로 던져 넣었다. 겁에 질린 영국인들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렸고, 곧 건물 안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11시 10분경 홍위병들은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국 대사관 직원들은 격하게 돌진해 온 홍위병들에게 머리를 뜯기고 넥타이를 잡힌 채로 벌벌 떨었다. 홍위병들은 영국인들을 걷어차고 때렸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다가 무릎을 꿇리고 사진을 찍었다. 또 그들은 영국인들의 손목시계를 빼앗고, 셔츠를 뜯고 바지까지 찢어버렸다. 함께 있던 영국인 여인들은 성적 모욕까지 당했다.
바로 다음날 런던 타임즈(The Times)나 가디언(The Guardian) 같은 영국의 대표적 언론은 물론, 영미권의 거의 모든 언론이 톱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예를 들면, 미국 인디애나주 퍼트남 현(縣) 그린캐슬(Greencastle)의 지방신문 <<데일리 베너>>도 제1면 왼쪽 상단에 “베이징 영국대사관, 불타고 약탈당하다!”(British Embassy, Burned and Sacked in Peking)란 제목으로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미국 인디애나 그린캐슬의 지방신문에까지 보도된 1967년 베이징 영국대사관 방화사건.>
영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이 사건이 “중공정부가 고의적으로 교사한 잔악무도하고 반문명적인 행위”라 규탄했다. 8월 30일 외무부장관 브라운은 중국의 외무부장관 천이(陳毅, 1901-1972)에 공식적인 항의 서신을 보내 외교관계의 유지와 외교사절단의 잠정 철수를 요구했지만, 홍위병의 공격 하에 있었던 천이는 중국 외교 특유의 “전술적 무응답”으로 화답했을 뿐이었다.
홍위병들이 영국대사관을 급습하기 이틀 전(1967년 8월 22일), 중공정부는 48시간 이내로 홍콩정부에 친중 언론의 폐간 조치를 철회하고, 구속된 친중 언론인을 즉각 석방하라는 최후통첩을 발송했다. 최후통첩의 발송주체는 베이징 정부였지만, 방화 테러의 주체는 홍위병들이었다. 홍위병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관민합작의 외교 테러였다. 물론 베이징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1967년 8월 22-23일, 홍위병들에 의해 불타버린 영국대사관 공관 내부/ https://roomfordiplomacy.com/beijing-3-1950-1972/ >
중국공산당의 전략적 고립주의
1960년대 초부터 중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고독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래 마오쩌둥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속적인 중소관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963년 이후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될 때, 중국은 소련과 더불어 북베트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1965-66년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세력 숙청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대륙에서 일어난 문혁의 광풍은 곧 국경 너머 마카오와 홍콩에 몰아쳤다. 1966년 12월 3일 마카오에선 친중 집단에 의한 대규모 정치투쟁이 일어났다. 1967년 봄부터 홍콩에도 격렬한 문혁의 돌풍이 일어서 5월엔 174개 친중 노동조합들이 파업에 나섰다. 파업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친중 세력의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1967년 5월 22일 홍콩정부는 167명을 구속했다. 또 용공 출판물을 전면 금지시키고 친중 세력의 교육기관을 폐쇄하는 조치를 이어갔다. 7월 1일엔 최소 8명의 친중 시위자들이 경찰에 총살당하고 맞아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7월 8일엔 광둥성의 민병(民兵)을 포함한 수백 명의 무장집단이 국경을 넘어 홍콩 북부의 샤타우콕(沙頭角) 지역으로 침입해 경찰서를 습격해 다섯 명을 사살하고 11명에 중상을 입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산세력은 지하로 스며들어 도시 곳곳에 사제 폭탄과 유인물을 설치하는 본격적인 게릴라 작전을 전개했다. 홍콩 경찰과 영국 병력은 도시 전역을 샅샅이 뒤지며 8천 개의 사제폭탄을 제거했지만, 1967년 10월까지 홍콩에선 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문혁이 홍콩으로 번지면서 실제로는 저강도의 중영전쟁으로 비화됐지만, 중공정부는 역시 완벽한 면책특권을 누렸다. 중공정부는 언제나 혁명군중의 자발적 반제투쟁이라 둘러댈 수 있었다.
주중 외교공관을 공격하라!
문혁 당시 재외 중국대사관 직원 중 3분의 2는 본국 송환되었다. 외국에 남은 중국인들은 현지 경찰 및 시민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해외 중국인의 정치투쟁은 본국의 홍위병들과의 교감 속에서 전개됐다. 예컨대 1967년 1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몰려간 중국유학생들이 소련경찰과 충돌한 후, 모스크바 시민들은 중국대사관의 건물을 일부 훼손했다.
이에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소련대사관에 몰려가서 인(人)의 포위망을 쳤다. 파리의 중국유학생들이 소련대사관에서 시위하다 파리 경찰에 제지당하자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차에서 내리는 프랑스 대사의 부인을 에워싸고 무려 여섯 시간 동안 구호를 외쳐댔다.
1967년 6월, 추방령을 받고 공항으로 가던 인도대사관 직원들이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67넌 8월 29일 런던에선 20명의 중국공사관 직원들이 야구방망이, 곤봉, 유리병, 도끼 등을 들고 영국 경관을 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영국 경관들은 경찰봉과 쓰레기통 뚜껑을 들고 방어해야만 했다. 이 놀라운 사건은 1967년 8월 30일자 런던 타임스 1면을 장식했다.
<1967년 8월 30일, 영국의 런던 타임즈 제1면. 1967년 8월 29일 런던의 중국공사관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영국의 경찰과 충돌하는 중국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
로이터 통신원 영국인 안쏘니 그레이(Anthony Grey, 1938- )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 27개월간 구금상태에 있었다. 중공정부는 그레이를 붙잡고서 홍콩의 친중 언론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인질 흥정을 이어갔다. 석방 후 출판한 <<베이징의 인질 (Hostage in Peking)>>(1970)에서 그레이는 베이징 주재 11개 외교공관이 홍위병들의 시위에 휩싸이는 과정을 상세히 고발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외교공관을 향한 홍위병의 테러는 다음 단계로 진행됐다. 1) 외교 공관 담벼락에 빼곡히 대자보를 붙이고 정치 구호를 휘갈긴다. 2) 공관 근처에 간이 화장실이 설치된 후, 차와 빵을 파는 행상들이 들어서고, 이어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몰려든다. 3) 모여든 군중은 곧 정연한 대오를 갖추고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강력한 시위를 전개한다.
그레이의 관찰에 따르면, 베이징의 시위는 동원된 군중의 “숫자와 철통규율에서 세계 그 어떤 시위와도 구분됐다······. 과격하게 성난 군중의 시위일 경우, 고도로 효율적인 주동자들이 불과 사흘 만에 외교공관 앞으로 1백만의 시위대를 행진시킬 수 있다.”
이 모든 사태는 정부의 묵인 혹은 은밀한 지시 아래서 일어났다. 겉으로는 홍위병들의 “자발적인” 테러였지만, 그 배후엔 언제나 정부가 있었다. 다시 말해, 최고영도자는 “반제투쟁!”의 기본원칙만 외쳐댔을 뿐이었다. 모든 구체적 집단테러는 “창의적인 혁명군중”의 자발적인 운동이라 포장됐다.
요컨대 중공정부는 군중을 움직여 베이징의 외국공관을 공격한 외교적 폭거의 전력이 있다.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과공(過恭)은 곧 파멸의 비례(非禮)다. 작은 나라가 먼저 바싹 엎드리면 큰 나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밟아버린다. <계속>
<1967년 여름 홍콩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친중 시위대. 홍콩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 연기”를 경고하고 있다. /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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