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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列傳 故事(86)奇貨可居[기화가거]

bindol 2021. 7. 24. 19:04

史記列傳 故事(86)奇貨可居[기화가거]

 

□《사기》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奇 : 기이할 기 貨 : 재물 화 可 : 옳을 가 居 : 살 거

□풀이: 진기한 물건은 사 둘만한 가치가 있다
나중에 높은 값에 팔기 위해 진기한 물건을 사서 쌓아 둔다는 뜻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는 훗날 큰 이익으로 돌아올 물건이나 사람한테 투자를 해 두는 것을 말한다

□구조: 奇貨∥可居
•奇貨(기화): 기이한 재물, 진기한 물건(주어)
-奇(기이할 기) 기묘하고 이상함. 여기서는 값어치 있는 것
-貨(재물 화) 돈이나 그 밖의 값나가는 모든 물건
•可居(가거): 집에 보관하다. 사서 집에 보관할 만하다.
-可(옳을 가) ‘능히’ 가능의 보조사다
-居(살 거)는 ‘보관하다’의 의미로 쓰여 집에 보관하다(동사술어)

□유래: 여불위(呂不韋)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거상이다. 그는 여러 곳을 왕래하며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천금의 돈을 쌓은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아버지 대부터 장사로 부를 일군 상인 집안이었다.

그 즈음 진(秦)나라에서는 소왕(昭王, 재위 BC306∼BC251)의 태자가 죽고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다. 소왕이 집정을 너무 오랫동안 하였기 때문에 태자인 안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술과 여자를 즐기는 일뿐이었다. 하여 그에게는 여자도 많고 자식도 많았다. 안국군은 그중에서도 화양부인(華陽夫人)을 가장 총애하여 그녀를 정부인으로 삼았다.

안국군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 자초(子楚)의 어머니인 하희(夏姬)가 안국군의 총애를 잃는 바람에 자초는 조(趙)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자초는 조나라에서 냉대를 받았으며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질 신분인 관계로 생활 또한 곤궁했다.

「어느 때, 여불위가 장사하러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갔다가 자초를 보고 가련히 여겨 말했다. “이는 기이한 물건이니 쌓아 둘 만하다.” 여불위는 자초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그대의 문호를 크게 해 줄 수 있소.” 자초가 웃으며 말했다. “먼저 그대의 문호를 크게 한 다음에 내 문호를 크게 해 주시오.” 여불위가 말했다. “그대는 모르는군요. 나의 문호는 그대의 문호가 크게 되면 커집니다.” 자초는 그 말의 뜻을 깨닫고 안으로 불러들여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진소왕은 나이가 많았고, 뒤를 이을 태자 안국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자로 만들어 세자로 세울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들은 자초는 일이 성공할 경우 여불위와 더불어 진나라를 나누어 가지겠다고 약속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을 주어 빈객들과의 교제 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자신도 500금으로 진기한 노리개 등을 사 진나라에 들어갔다.

여불위는 돈을 뿌려 연줄을 찾아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고, 그 언니를 통해 가지고 온 물건을 모두 화양부인에게 바쳐 환심을 산 후, 기회를 보아 화양부인에게 말했다. “자초는 어질고 지혜가 있으며, 널리 천하 제후의 빈객들과 교제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언제나 부인을 마음의 하늘로 우러른다는 말을 하며, 태자와 부인을 흠모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이 말을 듣고 부인은 매우 기뻐하였다.

여불위는 다시 그 언니에게 부인을 설득하도록 했다. “용모가 잘나서 쓰인 사람은 용모가 늙으면 총애도 시들해진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태자를 모시어 매우 총애를 받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어째서 지금 여러 공자들 중에서 현명한 자와 인연을 맺어 후사로 이을 양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남편이 세상에 있으면 그대로 존경을 받지만, 남편이 죽은 후면 양자가 왕이 되어야만 세력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 이를 걱정해 오던 화양부인은 언니의 충고에 따라 태자 안국군을 설득하여 자초를 후사로 삼기로 약속을 받아 내었다. 이로써 자초는 인질의 신분에서 일거에 세자가 되었고, 명성이 차차 제후들 사이에서 높아졌다.

여불위는 용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한단의 여자와 동거했는데, 이 여자는 얼마 후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자초가 여불위의 초청을 받아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 여자를 얻고 싶다고 청하였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가산을 기울여서까지 자초를 위해 진력한 것도 큰 이익을 낚으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마침내 여자를 자초에게 바쳤다. 여자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열두 달 만에 사내아이를 낳아 그 이름을 정(政)이라 했는데, 이이가 바로 훗날의 진시황이다.

BC257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의논하여 금 600근의 거액으로 감시하는 관리를 매수하고 도망하여 무사히 진나라로 귀국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초나라 의복을 입으라고 하여 화양부인을 알현하도록 했다.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던 화양부인은 이런 자초를 보고 아주 흡족해했다. 자초의 원래 이름은 이인(異人)이었는데, 이때 화양부인이 자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조나라에서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부인이 조나라 호족의 딸이었으므로 모자는 여러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무려 53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효문왕(孝文王, 재위 BC250∼BC250)이다. 효문왕은 화양부인을 황후로 하고, 자초를 태자로 봉했다. 조나라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을 정중히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자 자초가 왕이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장양왕(莊襄王, 재위 BC250∼BC247)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에 앉혀 문신후(文信侯)로 봉하고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장양왕은 또한 양모 화양부인과 생모 하희를 태후로 옹립했다. 장양왕은 즉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때가 BC247년으로 정의 나이 13세 때였다. 정은 여불위를 존경하여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 불렀다. 여불위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장사꾼에서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원문: 呂不韋賈邯鄲, 見而憐之曰, 此奇貨可居.
(여불위고한단 견이련지왈 차기화가거)
(어느 때) 여불위가 장사하러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갔다가 자초를 보고 가련히 여겨 말했다. “이는 기이한 물건이니 쌓아 둘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