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말보로 퇴출 선언
강경희 논설위원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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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양담배' 수입이 금지됐던 시절, 미국산 말보로는 흡연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담배였다. 해외의 친지나 유학생들이 한 보루씩 갖고 들어오면 얻어 피우려 법석 떨곤 했다. 영화 ‘타짜’의 조승우, ‘영웅본색’의 주윤발, ‘천장지구'의 유덕화 등이 피우던 담배이기도 했다. 우리뿐 아니었다. 공산주의 붕괴 후 옛 소련에선 ‘빨간 말보로' 한 상자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북한에선 세븐일레븐이나 말보로 같은 외국 담배가 화폐처럼 통용된다고 한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말보로는 거친 남성적 이미지를 주지만 1924년 미국에서 출시됐을 때는 여성용 담배였다. 그러다 1950년대부터 야성적 모습의 카우보이를 등장시킨 ‘말보로맨' 광고 덕에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판매가 급증했다. 전 세계에 흡연 붐을 일으킨 초대 ‘말보로맨’ 로버트 노리스는 정작 비흡연자였다고 한다. 실제 카우보이였던 그는 담배 광고가 자식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생각에 10여 년 만에 모델 활동을 중단하고 평범한 농장주로 살다가 90세까지 장수했다.
▶말보로를 만드는 세계 최대 담배 회사 필립모리스 인터내셔널(PMI) 최고 경영자가 “10년 안에 영국 담배 진열대에서 말보로가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웰빙 붐으로 담배 시장이 정체되자 고심 끝에 내놓은 전략이다. 그러나 담배 자체를 없애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비전은 ‘담배 연기 없는 미래‘다. 연초를 태우는 궐련형 대신 전자담배를 팔겠다는 것이다. 필립모리스가 개발한 아이코스는 출시 5년 만에 7조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이 회사는 전자담배가 몸에 덜 해롭다는 논리를 펴지만 금연 운동가들은 유해한 것은 마찬가지라며 이 전략도 맹렬하게 비판한다.
▶10년 뒤 말보로 담배가 지구상에서 완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영국 아닌 미국 시장 판권을 가진 필립모리스 USA는 ‘말보로 퇴출’ 운운하지 않는다. 이 회사의 모기업은 오히려 새로운 성장 사업을 찾겠다며 대표적인 ‘죄악 산업’인 마리화나 회사 지분을 45%나 인수했다. PMI의 ‘담배 연기 퇴출’ 전략 역시 이익 극대화를 위한 영리 목적에 다름 아니다.
▶PMI는 덴마크의 의료용 껌 제조업체, 영국의 의료용품 업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헬스케어 사업 부문도 확장하고 있다, 담배 회사가 건강 산업을 한다니 아이러니처럼 비치기도 한다. 자동차 회사가 ‘가솔린차 생산 중단’을 추진하고, 중동 산유국이 ‘탈석유 시대’에 대비한다며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는 세상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주력 제품도 버리는 것이 기업 생리다. 말보로 퇴출 선언이 연기 뿜는 담배의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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