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 논설실장
적자·서자·맏며느리·아드님·큰형님…. 대통령 후보를 뽑는 집권당 경선이 혈통·적통 논쟁으로 난장판이 되고 있는 건 민망한 일이다. 자칭 진보세력이라는 민주화 운동 경력자들이 모인 정당에서 벌어지는 족보 전쟁은 정체성에 대한 자기 부정이고 시대를 거스르는 역주행이다. 적서(嫡庶)의 신분을 타파해 서자라도 왕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보가 추구해야 할 가장 고귀한 가치 아닌가. 그런데 서로 손가락질하며 ‘너는 서자니까 안 된다’고 밀어내려 한다.
적통 논쟁은 진보 정체성 부정
대통령에 “큰 형님, 죄송” 사과도
친문 주류에 간택 받기 경쟁 돼
정책 실패 인정, 국민과 같이가야
선두 주자인 이재명 후보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후보들이 ‘민주당 적자론’을 들고나올 때만 해도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왕조시대도 아닌데 적자·서자 따지는 건 우습다”던 이재명 후보가 돌변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 표결했다며 이낙연 후보를 공격하면서 다른 이슈를 모두 태워버리며 들불로 번지고 있다. ‘리틀 노무현’이라는 김두관 후보가 “이낙연 후보는 노무현의 서자는커녕 얼자도 되기 어렵다”며 전쟁에 뛰어들고, 정세균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의장석을 지킨 사람”이라며 적통성 부각에 안간힘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금세 잡힐 기세가 아니다. 우선, 이 부조리극의 주인공들을 보라. 국무총리·당 대표·장관·도지사·국회의원…. 문재인 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고관대작들 아닌가. 누구보다 민주당의 주류 친문의 패권 작동 생리와 생존술을 훤히 꿰뚫고 있어, 생사가 달린 급소 잡기 경쟁에서 밀리면 끝장이란 걸 직감적으로 안다. 김두관 후보를 보자. 그는 201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계파정치를 비난해 강성친문의 표적이 됐는데, 얼마 전 공개적으로 10년 전 일을 사죄했다. “문 대통령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씀드리지 못했다. 큰 형님, 죄송하고 앞으로 잘하겠다. 이 업보를 어찌 풀어야 할지….”
낯 뜨거운 고해성사, 친문의 ‘간택’을 받으려는 절절함이 애처롭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안타깝지만 목소리 크고 힘깨나 쓰며, 주인 행세하는 친문 주류의 힘을 확인케 한다. 이들은 순혈의 ‘핏줄’을 중시하며, 무오류의 서사를 동원하고, 자기들끼리 이익을 독점하며, 내 편이면 불법과 비리도 눈감아주지만, 역린을 털끝만큼이라도 거스르면 좌표 찍어 댓글 테러의 제물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과시한다. 배교자를 관용하지 않는 절대자 숭배의 종교의식과도 같이 ‘정치적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 지지층을 결집하고 이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는 게 이들의 생존방식이다. 임기 말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유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힘의 작동 원리를 너무 잘 알기에 후보들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족보 전쟁은 숙명이다. 그러니 애당초 국가 운영 전략이나 미래비전을 다투는 대결장이 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비극은 주류의 간택 받기 경선으로 변질되면서 국민도 함께 실종돼버렸다는 점이다. ‘이게 정부냐’며 촛불을 들었던 국민은 이제 ‘문재인 정부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죄도, 성찰도 없으며 한술 더 떠 ‘묻고 더블로 가’ 공약이 난무한다. 과거의 실정과 국민의 고통은 묻고 더 센 규제, 더 화끈한 돈 풀기로 가겠단다.
대통령 취임사와는 달리 집권세력은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으려’ 한다. 부동산 정책, 탈원전, 비정규직 제로, 주 52시간제와 최저임금, 청년실업 등 간판 공약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이 모조리 실패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시장을 마구 들쑤셔놓은 부동산 정책으로 미친 집값은 벼락 거지를 양산하고 서민들은 ‘내 집 마련’ 꿈마저 잃어버렸는데도 “불법 거래가 시장을 왜곡했다”(홍남기 경제부총리)며 되레 국민을 탓한다. 청년 일자리는 줄고, 세금 풀어 만든 빈 강의실 불 끄기 같은 노인 알바만 늘었는데도 고용이 개선됐다며 억지를 부린다. 소득주도성장이란 해괴한 실험으로 자영업자들은 노포마저 접고 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됐고, 정책 실패를 가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뿌려댄 현금 살포 포퓰리즘으로 외국에서조차 우리나라의 곳간을 걱정하는 지경이 됐다. 청해부대 장병 301명 중 270명이 코로나 집단감염으로 긴급 후송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는 국방부 장관의 보고는 코웃음을 치게 한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순 있지만 그건 잠시뿐이다.
민주당 경선이 국민적 관심 속에 정권 재창출의 산실이 되려면, 당장우스꽝스런 족보 논쟁의 갑옷부터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미래지향적 발전 공약을 놓고 다투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나라의 진짜 주인인 국민을 배제한 채 동굴 속 우상에 갇혀 있으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순 없다.
민주당 사람들은 원수처럼 여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지만, 그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을 결심함으로써 불행한 사태를 막고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정민 논설실장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왕조시대도 아닌데 적자·서자 따지는 민주당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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