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광장에 모인 200만 군중의 분노, 문혁 종식의 전조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08.07 08:55
<1976년 4월 4-5일, 톈안먼 광장에 운집해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추모하며 4인방을 향해 비판을 쏟아내는 베이징의 군중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9회>
권력투쟁의 목적으로 마오쩌둥은 4인방의 선전·선동을 적극 활용했지만, 그들을 신뢰하진 않았다. 1975년 초 국무원의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의 건강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마오쩌둥은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에게 군사·행정·정치의 3권을 떠넘기는 파격적 정부개편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4인방은 채 1년도 못 된 1976년 4월 7일 군중반란을 책동한 혐의를 씌워 다시금 덩샤오핑을 몰아낼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버린 지 석 달쯤 되던 날이었다. 4인방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덩샤오핑을 몰아냈나?
마오, 쫓아냈던 덩샤오핑에 국정 책임 다시 맡겨
문혁이 개시된 후, 류샤오치와 함께 덩샤오핑은 반혁명적 수정주의 주자파의 우두머리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1969년 11월 류샤오치는 독방에 유폐된 채 의료방치로 지병을 안고 쓸쓸히 고독한 혁명가의 일생을 마감했다. 덩샤오핑은 1969년 10월 아내 줘린(卓琳, 1916-2009)과 함께 장시성 난창 외곽의 농기구 정비소로 추방됐다.
1972년 11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베이징으로의 복귀를 요청하는 간곡한 서신을 보냈다. 덩샤오핑을 수정주의자로 몰아 지방에 유폐시킨 장본인은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이제 그는 다시 덩샤오핑을 불러와선 국정의 책임을 맡기려 할 절박한 필요를 느꼈다. 붉은 정치꾼들만을 앞세워 통치를 하기엔 국정 혼란은 가중되고, 민심 이반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가 병상에 누웠기에 더더욱 그의 곁엔 합리적인 정무의 관리자가 필요했다.
1973년 2월 22일, 3년 반의 유배 생활 끝에 베이징으로 복귀한 덩샤오핑은 곧장 국무원의 부총리에 임명됐다. 1975년 1월 5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및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됐다.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1975년 6월 초부터 덩샤오핑은 정치국, 국무원 및 중앙군사위원회를 관장하는 국가의 총지휘자가 됐다.
<“타도 류샤오치, 타도 덩샤오핑: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는 대회/ 1967년 경>
1975년 1월 13일 저우언라이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이른바 농업, 산업, 국방, 과학기술에 걸친 이른바 “4대 현대화”의 원대한 계획을 선포했다. 계급투쟁 대신 경제건설로 국정의 방향을 트는 조치였다. 1975년 2월 1일 저우언라이는 은퇴를 선언했다. 국무원의 모든 직무는 덩샤오핑에 위임됐다. 5월 3일, 마오쩌둥은 4인방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 덩샤오핑에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게 했다. 5월 12일 덩샤오핑은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하는 외교적 깜짝쇼를 이어갔다. 실로 놀라운 국면의 변화였다. 물론 그 배후는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은 왜 덩샤오핑에게 대권을 일임하는 정치적 파격을 연출했을까? 그 역시 계급투쟁만으론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챙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마오는 군권을 확실히 장악하려 했다. 당시 중국 모든 지방에선 행정과 사법의 총지휘권이 군부가 이끄는 혁명위원회에 있었다. 마오는 덩샤오핑에 군권을 맡겨 “당이 총을 지배한다!”는 대원칙을 실현하려 했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불안한 군권을 장악하고, 혼란스런 중앙 정치를 이끌 유능한 관리자는 덩샤오핑 밖엔 없었다.
덩샤오핑은 기민하게 철도 교통의 회복을 국가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 전국 여기저기 철로가 두절돼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막힌 철도를 뚫기 위해 덩샤오핑은 1만천 여명의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고, 3천 명을 중범죄자로 단죄하는 대규모의 계급투쟁을 벌였다. 정치투쟁에 매몰된 철도노동자들을 모두 일터로 복귀시키자 1975년 4월부턴 전국의 철도가 순행하기 시작했다.
<1959년 대약진 운동 당시 정책을 토론하는 마오쩌둥(왼쪽)과 덩샤오핑(오른쪽)/ 공공부문>
곧이어 덩샤오핑은 철강 생산력의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문혁의 광풍은 철강 생산량을 급감시켰다. 전국적으로 매일 평균 철강생산량이 목표치에 2천, 3천 톤이나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생산 현장의 노동자들이 여러 분파로 갈려서 정치투쟁에 몰두했던 문혁의 참담한 결과였다. 철강 생산력을 복구하려면 무엇보다 생산 현장의 리더십에 유능한 관리자를 임명하는 경제적 합리성의 회복이 급선무였다.
덩샤오핑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태업하는 중간층 관리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 저장성 혁명위원회의 과격한 노동자들이 개혁에 저항하자 덩은 공작조를 급파해 굴복시켰다. 지난 주 살펴봤듯, 덩샤오핑은 윈난성 샤뎬의 무슬림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파견해서 무려 1600명의 촌민들을 도륙하는 극한 조치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실용적 합리성, 치밀한 계획성, 무자비한 실행력······. 마오가 덩에게 원했던 바로 그 “비상한 재능”이었다. 전국을 붉은 혁명의 광열에 몰아넣고 있던 4인방으로선 배신감을 넘어 생존의 위협을 느낄 지경이 됐다. 4인방은 덩샤오핑을 정(正)조준해 반격을 개시해야만 했다.
저우언라이의 죽음, 들불처럼 번진 추모 열풍
1976년 1월 8일 아침 9시 57분, 국무원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가 베이징 한 병원의 병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78세.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한 충직한 조수에 불과했다. 특히 문혁 개시 후 6년의 세월 동안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중앙정치를 좌우해왔다.
저우언라이 역시 문혁에 큰 책임을 져야했지만, 중국의 대다수 인민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고 흠모했다. 문혁 초기엔 모두가 마오쩌둥의 주술에 걸려 있었기에 특별히 저우언라이가 표적이 될 리 없었고, 1973년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이후부턴 4인방이 저돌적으로 저우언라이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4인방은 그가 우경분자들을 되살려내 수정주의 주자파의 노선을 간다고 비판했다. 저우언라이를 향한 그들의 창끝이 덩샤오핑을 동시에 겨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76년 1월 8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인민영웅기념탑을 향해 저우언라이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공공부문>
저우언라이 사후(死後), 중국 전역이 술렁였다. 들불처럼 전국에 거센 추모의 열풍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사인방은 추모 열기를 전하는 언론 기사를 사전에 검열하고 삭제했다. 대규모 민중 시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인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저우언라이지만, 그에겐 대규모 국장(國葬)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공중앙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던 추모 활동을 과도하게 제약하고 나섰다. 그럴수록 군중은 더욱 격심한 분노에 휩싸여 추모식을 거행했다.
1976년 1월 11일 저우언라이의 시신이 베이징의 파바오산(八寶山) 공동묘지에 안치될 때, 백만 넘는 군중이 추위에 벌벌 떨며 길거리를 매웠다. 저우언라이를 공격해왔던 4인방으로선 그런 군중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우언라이 관련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영화 상영까지 금지했지만, 추모의 파도는 더욱 거세졌다. 특히 난징(南京)에서 거행된 추모식에는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추모식이 대규모 정치집회로 바뀔까 우려한 지방정부가 기념관을 폐쇄하자 난징의 시민들은 더욱 격분했다.
1월부터 4월까지 중국 전역에선 중국 인민들이 저우언라이의 사진을 내걸고 공개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3월 말 난징의 곳곳에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대자보와 표어가 나붙었다. 급기야 3월 29일, 800여 명의 난징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3월 29일-30일 기차역에 몰려간 학생들은 10시간 넘게 먼 지방까지 달려가는 열차의 벽면에 페인트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고 4인방을 규탄하는 수많은 정치 구호를 과감하게 적었다. 전국에 저항의 메시지를 전하는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놀란 중공중앙은 배후세력의 조사에 들어갔지만, 난징 시민들은 더 큰 추모식을 개최하며 저항했다. 사흘 동안 무려 60만의 추모객이 모여들었다. 곧 추모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허난성 정저우(鄭州)에서도 4월 초부터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급기야 4월 4일 청명절(淸明節),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는 대규모 군중이 화환을 들고 추모 시가를 읊으며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1976년 4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군중의 모습. 누군가 기념탑에 붙여 놓은 추모시를 노트에 베껴 쓰고 있다. / 공공부문>
1976년 톈안먼 사건, 깨어나는 광장의 군중들
확인할 순 없지만, 그날 톈안먼 광장엔 흔히 2백만 군중이 운집했다 한다. 그 속엔 학생들, 가난한 농민들, 군인들, 고위간부의 자제들, 평범한 중년의 시민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1966년 홍위병 집회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부의 감시와 규제를 뚫고 모여든 성난 군중의 집회였다. 시민들의 자발적 저항이란 점에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유래를 찾기 힘들었다.
10년 내내 갈가리 찢겨 서로를 헐뜯고 짓밟는 문혁의 광기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민중이었다. 밀실을 벗어나 광장으로 뛰쳐나온 군중은 정당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대담하게 한 목소리로 중앙정치를 장악한 4인방의 만행을 규탄했다. 더 나아가 마오쩌둥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잖았다.
4월 5일 이른 아침, 정부는 베이징 주변의 군부대를 통원해 연합지휘부를 만들고, 광장의 남쪽과 북쪽을 동시에 봉쇄했다. 기념탑 아래 인민이 쌓아올린 추모의 화환과 팻말들은 이미 전날 밤에 철거된 후였다. 10만의 추모객들이 격분해서 광장 주변의 정부 청사들에 난입했다. 곤봉으로 무장한 대규모 민병대가 광장에 투입됐다. 곤봉을 휘두르며 해산을 외치는 민병대의 기세에 질려 겁먹은 군중들은 서서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6시 무렵 광장은 텅텅 비었지만, 소수의 시위대는 10시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한다.
모처럼만에 일어난 군중의 저항은 그토록 허망하게 끝이 났지만, 그 여진(餘震)은 전국을 흔들었다. 무엇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군중이 광장에 몰려나와 정부를 향해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다는 사실만으로 1976년 4월 5일 톈안먼 광장은 저항의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1978년 11월 베이징 시단(西單)을 대자보로 도배한 “민주장(民主墻) 운동”(1978년 11월-1979년 12월)으로, 10년 뒤엔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 운동”/ 공공부문>
저우언라이 사후 4인방은 “반(反)덩샤오핑” 캠페인에 박차를 가했다. 2월 2일부터 덩샤오핑은 실제적으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3월 3일 마오쩌둥은 다시금 문혁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통보를 반포했다. 청명절 톈안먼 사건 직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군중 시위의 배후로 지목했고, 덩샤오핑은 곧 모든 직무를 상실한 후 중앙정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컴컴한 어둠이 밀려왔다. 그때는 감히 그 누구도 문혁의 종식을 예감하진 못했다. 오직 하늘만이 구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거대한 전조를 내비쳤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26분, 후베이의 탄광도시 탕산(唐山)에 강도 7.6의 대지진이 엄습했다. 최소 24만 2천 명, 최대 65만 명이 사망하고, 70만 명이 부상을 입는 자연의 대재앙이었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버리기 불과 40일 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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