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종교의 자유 달라!” 문혁 말기 무슬림 순교자들

bindol 2021. 8. 2. 06:41

“종교의 자유 달라!” 문혁 말기 무슬림 순교자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07.31 08:55

 

 

 

 

 

 

 

<중국 내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후이족(回族)의 인구는 대략 1천1백만명 정도를 헤아린다. 후이족 외에도 위그루족, 카자크족, 우즈벡족 등 모두 열 개의 소수민족의 구성원들이 대다수 이슬람교도다. https://www.topchinatravel.com/china-muslim/muslim-in-china.htm>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68회>

627년 광주(廣州, 현재 광둥성 광저우)에 중국 최초의 청진사(淸眞寺, 이슬람교사원)가 지어졌다. 이후 1400년의 세월 동안 이슬람교는 중국 전역으로 꾸준히 퍼져나갔다. 2014년 현재 중국 전역엔 모두 3만9135개의 이슬람사원이 있다. 그중 2만5000개가 신장 지역에 집중돼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들 중에서 10개 민족은 무슬림들이다. 중국 내 무슬림 인구의 정부 집계는 총인구의 0.45%(600만)에서 2.85%(3900만)까지 상이한 수치가 있다. 다른 민간의 집계는 6000만 명에서 8000만 명을 헤아린다. 쉽게 말해, 중국의 무슬림 인구는 최소 600만 명에서 최대 8000만 명에 달한다. 물론 이러한 큰 통계적 편차는 현재 중국에서 이슬람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4년 시진핑 주석은 신장의 종교적 극단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은 국가안전을 위협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중국공산당 정부는 무슬림 소수민족에 대한 조직적인 감시망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왔다. 2017년 이래 신장의 인민대표대회는 서부지역에서 무슬림 여성의 히자브(hijab, 베일) 착용, 수염 기르기, 특정 이름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시시콜콜한 반인권적 법령들을 채택했을 정도다.

 

 

 

 

 

 

 

 

<2020년 10월 8일, 영국 런던에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과 제노사이드를 당장 멈추라며 시위하는 사람들/ https://www.icij.org/investigations/china-cables/british-lawmakers-call-for-sanctions-over-uighur-human-rights-abuses/>

 

국제앰네스티 “중, 신장 지역 무슬림에 반인륜적 범죄 자행”

2021년 6월 10일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50명이 넘는 전(前) 수감자들의 사실 증언에 기초해서 중국공산당 정부가 신장 지역의 무슬림들에 대한 반인류적 범죄를 자행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신장 지역에서는 수십만 명의 무슬림 남녀들이 집단수용소에 갇혀서 날마다 고문에 시달리고 있으며, 수백만 명이 전 세계에서 가장 삼엄하고도 조직적인 ‘대중 감시(mass surveillance)’를 당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무슬림 집단에 그들의 종교 전통, 문화 관습, 지방 언어까지 모두 포기하라는 거센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이슬람교도들의 뇌리에 코란의 교리 대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주입하고, “중화민족”의 일원이라 각인(刻印)하고 싶어 한다.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신장의 광활한 영토가 독립한다면, 중공 정부로선 너무나 큰 군사전략적, 경제적, 외교적 손실이기 때문이다. 통일 정책의 일환으로 중공 정부는 무슬림 교도들의 “사상 개조”를 꾀하고 있다.

“사상 개조”란 194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이 매번 정치운동을 벌일 때마다 전면에 내걸었던 구호였다. “낡고, 부패하고, 타락한 봉건적 사상 잔재”를 온전히 뿌리 뽑고 “새롭고 올바른 사회주의 사상”으로 개개인의 정신을 정화한다는 발상이었다. “사상 개조”의 캠페인은 1950년대 내내 중국 사회를 들쑤셨고, 문화혁명(1967-76) 시기 최고조에 이르렀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날도 중국에서는 소수집단을 향한 문화혁명이 공공연히 진행되고 있다.

 

무슬림 촌락에 끔찍한 학살극...마을 5명 중 1명 숨져

문화혁명 기간 내내 중국의 각지에선 크고 작은 학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슬픈 중국” 시리즈에서도 이미 다뤘지만, 문혁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1966년 8월 홍위병들이 1700여명 “계급천민”을 제거한 베이징의 “다싱(大興)구 대도살(大屠殺),” 1967년 8월-10월 66일간 8000명이 넘는 “흑오류(黑五類)” 계급적인을 일사불란하게 잡아 죽인 후난(湖南)성의 “다오(道)현 대도살,” 1968년 8월 10만-15만 명이 도륙된 광시(廣西) 대도살”을 문혁 3대 대학살 사건으로 꼽는다. 학살의 규모와 잔혹성 때문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지만, 이 세 사건들 외에도 문혁 기간 내내 크고 작은 학살극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75년 7-8월 윈난(雲南)성 남부 샤뎬(沙甸) 지방의 일곱 개 1500여 호의 무슬림 촌락에선 무려 18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학살극이 자행됐다. 전체 인구가 고작 7200여 명 정도였으니, 거의 21%,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중국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한 이슬람교도들이었다. 그중엔 300명이 넘는 아이들과 노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대량학살의 주체는 놀랍게도 중공중앙의 명령을 받고 현지에 급파된 인민해방군이었다. 문혁 이후 사인방(四人幇)이 과잉진압의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의 지위에서 진압 명령을 내린 최종 책임자는 3년 반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에 복귀에 국가의 중대사를 도맡아 보던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었다.

그림 <1975년 샤뎬사건의 피해자들이 죽은 동지들의 시신을 윈난성 성도 쿤밍의 이슬람사원에 안치하는 장면/ 공공부문>

 

비극의 발단을 추적해보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 소급된다. “인민 해방”을 내걸고 전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혁명”의 기치를 들고 기존의 사회 체제를 허물기 시작했다. 후이족(回族)이 모여 사는 샤뎬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무슬림 군락(群落)이었다. “1949년 해방” 이전 그들은 채소 및 담배 농사에 종사했고, 작은 규모로 농작물과 축산물을 시장에 내다팔며 생계를 이어왔다. 1950년대 초반 인민해방군이 윈난성을 점령한 후 사회주의 정책이 시행되자 샤뎬의 후이족은 일대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공 정부의 농업 정책에 따라 샤뎬의 후이족은 채소 농사 대신 곡물 재배의 업무를 할당받았기 때문이었다.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의 폐단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들은 정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약진 운동 기간 후이족은 죽음의 벼랑 끝으로 몰려갔다. 마오쩌둥이 곡물 증산을 핵심으로 삼는 “이량위강(以糧爲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국의 농촌을 닦달할 때였다. 지방의 현실을 무시한 중공중앙의 명령은 생존의 지혜를 파괴했다. 1959-61년 대약진의 돌풍은 샤뎬 지방에도 대기근의 쓰나미로 몰아쳤다.

 

참다못한 샤뎬의 후이족은 지방 정부 당국을 향해 채소 농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요구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지방 정부는 도리어 후이족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았다. 격분한 후이족은 관료부패와 간부들의 횡포를 처벌하라 요구하며 강력한 저항을 이어갔지만, 그럴수록 더욱 궁지로 내몰렸다.

 

“종교는 생산성 저하 초래” 윈난의 무슬림, 종교 자유를 빼앗기다

사회주의 명령경제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부조리 위에 종교적 갈등이 중첩됐다.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항의하는 후이족의 종교가 하필이면 이슬람교였다. 중공 정부는 오래전부터 샤뎬에 공작조(工作組)를 주둔시키며 후이족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공작조는 종교 활동이 생산력 저하를 초래한다며 종교의 자유를 더욱 제약했다. 문혁의 전조인 사청운동(四淸運動, 1963-1966)의 과정에선 그나마 3개 남아 있던 이슬람사원들이 모두 폐쇄 조치됐다. 후이족은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공안기구는 구속자를 늘려가면서 팽팽한 긴장 국면이 이어졌다. 그 절정이 바로 문화혁명이었다.

문혁 당시 중국의 홍위병은 소수민족 고유의 “사상, 문화, 풍속, 습관”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파사구(罷四舊)” 깃발을 들고 소수민족의 고유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조반파 홍위병들은 샤뎬으로 몰려가서 후이족이 신성시하는 이슬람사원을 “봉건 보루”라 부르며 폐쇄했다. 그들은 이슬람 경전을 훼멸함은 물론, 사원의 제사장을 잡아와서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벌였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잡아와선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후이족은 집단 모독에 시달리고 백주의 테러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홍위병은 마호메트 상(像)을 파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1974년 11월 17일 윈난성 카이위안(開遠) 다좡(大莊)의 무슬림의 쿤밍 방문 기념/>

1968년 3월 윈난성 혁명위원회가 설립되자 곧 인민을 조반파와 보황파(保皇派)로 양분하는 적대적 계급투쟁이 시작됐다. 샤뎬의 다수는 보황파로 몰려서 격심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1968년 12월 이어서 샤뎬에 진주한 군인 선전대는 200여 명의 후이족을 잡아서 정치집회를 열어 모욕을 준 후, 그 중 84명에 반군의 혐의를 씌워 단죄하고, 14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군대가 이슬람사원에 주둔하면서 종교 활동은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그 후로도 계속 샤뎬의 후이족들을 향한 광기어린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참다못한 후이족은 1973년 10월부터 정부를 상대로 종교 활동의 허락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격분한 촌민들은 폐쇄된 이슬람교사원을 다시 여는 강경책을 이어갔다. 지방 정부는 이를 반혁명행위라 규정하고 맞섰다.

1974년 말 샤뎬의 후이족은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800여 명에 달하는 샤뎬의 후이족은 윈난성의 성도 쿤밍(昆明)으로 몰려가선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또 한 무리는 베이징까지 가서 예배의 자유를 인정하는 보다 현실적인 “민족종교 정책”의 실시를 요구하며 투쟁했으나······. 역시 근본적 해결책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위원회는 선제적으로 비(非) 무슬림 촌민들로 “민병 연합지휘부”를 결성한 후, 그들에게 총과 실탄을 지급해 그 지역의 순찰을 맡겼다. 이에 강한 위협을 느낀 후이족은 자체적으로 “샤뎬 민병단”을 결성해서 맞섰다. 보름이 채 못돼 인근 지대의 촌민들은 군대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두 집단이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앙정부까지 나서서 두 집단 사이의 타협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975년 1월 샤뎬사건의 해결을 위해 베이징에 간 샤뎬 후이족 대표단/ http://www.muslimwww.com/html/2020/xueshu_0120/35286.html>

인민해방군, 이슬람사원에 총격...양민 학살

급기야 1975년 7월 29일 중공중앙은 인민해방군 14군을 샤뎬에 투입했다. 다음 날 새벽 3시를 기해 부대는 샤뎬 민병단이 보위하던 이슬람사원에 총격을 가했다. 새벽 4시경, 후퇴했던 샤뎬 민병단이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해 사원을 탈환하고 군병력의 화기까지 탈취하지만, 이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후였다. 이에 격노한 후이족 민병단은 몇 자루 총과 재래식 창칼 등을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점심나절부터 군부대는 대포를 쏘아댔다. 이후 7-8일에 걸쳐 군대와 민병단 사이엔 유혈의 무장투쟁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900여명의 후이족이 학살당하고, 600여명이 부상당하거나 영영 불구가 됐다.

8월 4일, 157명의 남녀노소가 투항 의사를 밝히며 목숨만 살려 달라 간청했지만, 군대는 그들을 정조준해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갑작스런 총격에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 시신들 틈에서 꿈틀거리거나 흐느끼는 사람들을 향해 확인 사살이 이뤄졌다. 확인 사살 후에도 세 명은 살아남았다지만······. 사망자의 총수는 1,600명에 달했고, 부상자와 불구자가 1,000명을 넘었다.

1975년 여름, 막바지로 치달은 문화혁명은 여전히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천번지복(天飜地覆)의 혼란상을 보이고 있었다. 국무원의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이었다.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이 숨을 거두기 불과 한 해 전이었다. 덩샤오핑이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개혁개방”의 깃발을 들고 전국의 인민을 향해 “치부광영!(致富光榮, 치부하면 큰 영광이다)”이라 소리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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