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만물상] 재정 중독

bindol 2021. 8. 25. 05:03

[만물상] 재정 중독

강경희 논설위원

 

강경희 논설위원 - 조선일보

 

www.chosun.com

입력 2021.08.25 03:18

 

며칠 전 행주산성에 허경영이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백마 타고 나타나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대선 공약은 “만 18세 이상 국민에게 1인당 1억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황당한 얘기라 웃고 넘겼는데 내년도 예산안이 올해 본예산(558조원)과 두 차례 추경을 합한 돈 604조원보다도 더 많을 것이라는 정부 발표를 보니 갑자기 ‘허경영’이 떠올랐다.

일러스트=김도원

 

▶허씨 주장대로 만 18세 이상 인구 4400만명에게 1억원씩 주려면 4400조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문 정부 속도대로 빚을 내고 씀씀이를 늘리면 다음 정부 5년간 정부 예산은 다 합쳐 4400조원에 육박할 수도 있다. ‘정부 씀씀이 확 줄이고 1인당 1억원씩 나눠 준다’는 허씨는 여기까지 계산한 것일까. 허씨가 다음에는 ‘1억원을 5년 분할 지급하겠다’고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예산이 100조원을 처음 넘긴 건 2001년이다. ‘수퍼 예산’ 표현이 언론에 본격 등장한 건 5년 전이다. 전임 박근혜 정부 시절, 2017년도 예산안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400조원 넘게 편성했다. 2016년보다 3.7% 늘렸는데도 당시 야당 민주당은 “빚더미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예산을 제대로 안 쓰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던 사람들이 ‘400조원 수퍼 예산’을 5년 만에 ‘600조원대 울트라 수퍼 예산’으로 만들고, 나랏빚 660조원은 근 1000조원으로 늘려놨다.

 

▶오랫동안 예산실 공무원은 정부 부처 사이에 ‘갑 중의 갑’으로 꼽혔다. 부처마다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려는데 예산실 관료들은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서 보면 공무원들 원망 들어가며 나라 곳간 지키고 허리띠 졸라매 건전 재정을 유지해온 믿음직한 파수꾼들이었다. 문 정부 들어 빚내 돈 펑펑 쓰는 게 잘하는 일이 되니 곳간지기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곳간지기들은 간데없고 곳간털이들만 득실댄다.

 

▶문 정부 5년을 거치면서 확실하게 늘어난 4가지가 ‘정부 씀씀이, 나랏빚, 집값, 전셋값’이다. 예산 규모로만 보면 불과 10년 전 300조원이던 시절에 비해 정부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정부가 2배 유능해졌나. 그 반대 아닌가. 나라가 빚을 내 돈 뿌리는 것은 너무 쉽다. 국민이 좋아하니 대통령과 정권 입장에선 달콤하다. 마약 중독과 다를 바 없다. 중독자는 뇌 신경 자체가 달라질 정도라고 한다. 한번 중독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재정 중독에 빠진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