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우리는 미국, 터키 등을 血盟이라고 한다. 血盟은 피로 맺어진 同盟(동맹)을 뜻한다. 따라서 同盟보다는 血盟이 훨씬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한·미간의 ‘血盟’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글들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 곳에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한국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하는 암시가 강력하게 담겨 있다.
하지만 同盟이나 血盟은 원래 같은 개념이었으며, 血盟에서의 血은 인간의 피라기보다는 동물의 피를 말한다는 점에서 혈맹의 성립조건은 인간의 피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約束(약속)과 名分(명분)일 것이다.
血은 갑골문(왼쪽 그림)에서 그릇 속에 작은 원이 그려진 모습인데, 작은 원은 피를 뜻한다. 이후 원이 삐침 획으로 변해 지금처럼 되었다. 피(血)를 그리면서 그릇(皿)을 동원한 것은 피가 會盟(회맹)의 주요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周禮(주례)’에서는 나라 간에 불협화음이 생기면 각 제후들이 모여 盟約(맹약)을 했는데, 제후들이 합의를 도출하면 그것을 천지신명 앞에 서약하면서 동물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신다고 했다. 그들은 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거기서 犧牲(희생)을 죽인 다음 왼쪽 귀를 잘라 옥쟁반에 담고, 옥 사발에 피를 받아 돌려 마시며, 남은 피로 합의된 맹약의 내용을 옥에 기록하여 땅에 묻었다. 이러한 기록을 盟書(맹서)라고 한다. 맹약을 위배하는 자는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할 것을 기록하고 한 부는 땅에 묻고 다른 한 부는 副本(부본)으로 남겨 盟主(맹주)가 보관하게 하였다.
따라서 그릇(皿) 속에 담긴 피(血)는 會盟 때 盟誓를 약속하는 표지이다. 약속 이행을 위한 맹세를 盟誓라고 하지만, 사실 盟과 誓는 다른 개념이었다. 동물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행위를 말하는 盟과 서약을 의미하는 誓가 합쳐진 것이 盟誓다.
盟은 갑골문(오른쪽 그림)에서는 그릇 가득 피가 담긴 모습을 그린 會意(회의) 구조였다. 하지만 이후 금문에서는 피(血)가 소리부인 明으로 바뀌었다. 誓는 言(말씀 언)이 의미부이고 折이 소리부라고 하지만 ‘화살을 부러트려 誓約을 하던’ 옛 관습을 생각하면 의미부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誓는 군대에서 했던 宣誓(선서)가 원래 뜻이다.
하영삼 경성대 교수 ysh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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