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644] 굳고 곧은 갈매나무

bindol 2021. 10. 14. 05:27

[정민의 世說新語] [644] 굳고 곧은 갈매나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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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10.14 03:00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부임했다.(왼쪽)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여성' 3권3호(1938년3월)에 실렸던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삽화는 당대의 전설적 삽화가·장정가이자 출판미술의 개척자인 정현웅의 그림이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은 쓸쓸한 시다. 남신의주 유동의 박시봉이란 목수 집 문간방에 부쳐지낼 때 썼다. 삿(삿자리)을 깐 추운 방에 틀어박혀 슬픔과 한탄 같은 것들이 모두 앙금이 되어 가라앉을 때쯤 해서 창호문을 치는 싸락눈 소리를 듣다가 그는 이렇게 되뇐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날은 저물고 산은 멀다. 산 뒤편, 그중에서도 옆쪽의 바위투성이 길섶에 외로이 선 갈매나무. 저녁에 눈까지 내리니 춥고 고달프다. 하지만 나무의 ‘굳고 정한’ 기운이 이 고달픔에 그만 폭삭 주저앉지 않고 그를 꿋꿋이 서 있게끔 만든다. 해설서를 찾아보니 ‘정한’은 ‘정(淨)한’, 즉 ‘깨끗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 풀이다. 그럴까? ‘정한’은 ‘깨끗한’이 아닌, ‘정(貞)한’ 즉 ‘곧은’이란 뜻이다. 굳고[固] 곧은[貞], 목질이 단단하고 곧게 자란 갈매나무란 의미다.

문장' 1939년 7월호에 실린 '백석 초상'. 정현웅과 백석은 서울 뚝섬에 이웃해 살았고, 조선일보 출판부에 책상을 나란히 놓고 일했다. 정현웅은 백석의 옆모습 스케치에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적었고, 백석은 1939년 10월 조선일보를 사직한 뒤 만주 여행을 떠나는 열차 안에서 '정현웅에게'라고 부제를 단 헌시 '북방에서'를 썼다. /조선일보 DB

 

김지행(金砥行·1716~1775)의 ‘밀암집(密菴集)’ 중 ‘고목부(槁木賦)’에서, “여린 자질 지녔지만 굳고도 곧음이여! 티끌 흙에 더럽혀도 뜻만은 빼어나네. 네 삶이 때와 맞지 않음을 슬퍼함이여! 세상 길에 어울려 따라 하지 아니하네. 깊은 골짝 높은 바위에 부치어 있음이여! 우거진 숲 굽어보며 혼자서 서 있구나.(依幼質而固貞兮, 凂塵土而志超驤. 哀汝生之不時兮, 莫與平露伍而模楷. 列寄絶壑之嶄巖兮, 俯重林而獨立.)”라 한 것에 거의 가깝다.

 

누구에게나 시련의 시간은 있다. 다만 그때의 내 자세를 생각할 뿐이다. 간난의 시절에도 나는 그 앞에 무릎 꿇거나 타협하지 않고, 쌀랑쌀랑 그 눈을 맞으면서 추운 밤 저 굳고 곧은 갈매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그것에 맞서겠다는 다짐이다. 그 생각의 힘으로 슬픔과 한탄의 현실을 그만 잊고, 앙금 위로 말갛게 떠오른 마음을 보며 그 시련과 정면으로 맞설 힘을 비로소 얻었노라고 시인은 얘기한다. 그러니 주저앉지 말고 힘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