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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에서] 사하라 사막서 본 盧의 공과

bindol 2021. 10. 29. 04:23

[데스크에서] 사하라 사막서 본 盧의 공과

정지섭 기자

 

정지섭 기자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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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10.29 03:00

 

식민 통치와 독립, 남북 분단, 동족상잔, 군부 쿠데타와 독재, 이념 갈등과 민주화 항쟁. 한국 현대사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9800㎞ 떨어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토 크기로 셋째, 인구로 열째 가는 나라 수단이다. 인종·언어·종교 무엇 하나 공통분모가 없는데 근현대사 궤적 곳곳이 한국이 걸어온 길과 묘하게 겹친다.

26일 수단 수도 하르툼에서 열린 시위에서 한 수단 시위자가 수단 국기를 들고 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과도정부를 엎고 권력을 찬탈했다./ EPA 연합뉴스

 

영국과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1956년 독립한 이 나라는 민간과 군부, 사회주의 세력 등 정파 간 권력투쟁이 30여 년간 이어지며 혼란과 빈곤이 지속됐다. 1989년 쿠데타로 집권 뒤 30년간 통치한 오마르 알 바시르는 임기 중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체포영장을 내줄 만큼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았다. 독립 이후 이슬람·아랍세가 강한 북부와 기독교·토착 신앙을 믿는 흑인이 주축인 남부 간 내전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결국 2011년 남·북으로 쪼개졌다. 이때 풍부한 유전 지대가 남수단으로 넘어갔고 (북)수단 국토 대부분은 사하라 사막과 삭막한 초원만 남았다.

 

암울하던 이 나라가 3년 전 변화의 전기를 맞았다. 경제난과 독재를 참지 못하고 봉기한 반정부 시위에 이은 쿠데타로 이듬해 봄 알 바시르 30년 폭정이 종식됐다. 야권과 군부는 ‘질서 있는 민주화’에 뜻을 모으고 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군부와 야권, 시민사회 진영에서 공동 참여하는 통치 기구를 꾸렸다. 2023년 항구적 민주 정부 출범 일정을 잡고 차근차근 절차를 밟았다.

 

세계가 보는 눈이 달라졌다. 미국은 과도정부가 과거 자국 극단주의 테러로 희생된 미국인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하자 테러 지원국 족쇄를 풀고 국제사회 복귀를 도왔다. 각국의 인도주의·개발 원조가 잇따랐다. 민주화 열망과 경제 발전 희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불안함의 혼재는 한국의 1987년과 흡사했다. 그러나 수단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군부가 지난 25일 정변을 일으켜 과도정부를 엎고 권력을 찬탈했다.

부산시 공무원들이 28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시청 1층 로비에 마련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분향소를 조문하고 있다. /뉴시스

 

퇴행 기로에 놓인 수단의 모습은 민주화로 정상 국가가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수단이 아니더라도 독립 후 60년 안팎 세월 동안 정치 안정이나 경제 발전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비틀거리는 나라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은 식민 통치를 벗어난 동시대 신생국 중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모두 이뤄내며 문화 강국까지 된 희귀 사례다.

 

지금 위상을 다지는 데 1987년 민주화가 커다란 디딤돌이 됐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논란이 있지만 그 시대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과(過)에 대한 반성 못지않게 공(功)에 대한 재평가가 나오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의 장례가 우리가 이뤄낸 성취와 가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